알라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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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알라의 칼‘이라는 호칭이 카리드 이븐 알 와리드(Khalid ibn al Walid)에게 주어졌다. 그 이유를 설명해주겠는가?
A: 먼저, 이슬람 전투들과 사건들에 관한 ‘역사적’ 기록 모두는 승리한 무슬림들에 의하여 쓰여 진 입증할 수 없으며 확인할 수 없는 일방적인 기록들에 근거한다는 것을 우리 독자들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 추방당하고, 살해당하고, 노예가 된 기독교인들 또는 유대인화 된 아랍인들이 목격한 기록들이 발견된 적이 없다. 다신교도 아랍인들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슬림 군대들이 기독교 비잔틴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속도는 다음 사실들의 결과였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1. 기독교인들이 그들 가운데 너무 분열되어 있어서 가톨릭 유럽은 그들을 도우려고 오기보다는 비잔틴 기독교인들이 아랍인들에게 패배하도록 기꺼이 방치하였다.
2. 많은 도시들이 무슬림들에게 항복하였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 다른 종파들이 이슬람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 보다 비잔틴 기독교인들을 더 증오하였기 때문이었다.
3. 비록 무함마드의 이슬람 도적떼들이 공성기구, 쇠뇌 또는 성벽이 있는 도시들을 정복하는데 필요한 어떤 기술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이 없었지만 기독교인들의 굴욕적인 항복은 그들에게 번개와 같은 승리를 허용하였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1,400년 전보다 더 많이 분열되어 있다. 특히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근본주의 이슬람 부흥의 치명적인 맹습에서 고통 받고 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그들 기독교 형제자매들을 돕기 위하여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게다가 유럽 기독교인들은 그들 종교에 그리고 그들 국민에 자부심도 없고 그들의 민주주의 정부를 방어하려 하지도 않는다.
카리드 이븐 알 와리드(Khalid ibn al Walid; 592-642)는 메카의 꾸라이시 부족 출신으로 이 부족은 무함마드를 반대하였고 우흐드(Uhud) 전투에서 그들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이슬람을 받아들여서 후다이비야(Hudaybiyyah) 협정 후에 무함마드와 협력하였고 무함마드를 위하여 많은 원정을 지휘하였다.
카리드가 메디나에 도착하고 세 달 후에 무함마드는 이슬람을 받아들이라고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편지와 함께 사절단을 가사니드(Ghassanids)에게 보냈다. Mu'tah를 지나는 동안 이 사절단이 붙잡혀서 가사니드의 지방 관리에게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전통적으로, 외교사절단은 공격받지 않았지만 이 암살의 소식은 무함마드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것이 629년 이었다. 가사니드를 징계하기 위하여 원정대가 조직되었다. 무함마드는 전투에서 사망할 경우에 서로 승계하여 지휘를 계속할 다른 세 명의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전투에서 이 세 명의 지휘관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카리드가 지휘관이 되었다. 무타(Mu'tah) 전투로 알려진 전투에서 숫자적으로 우세한 비잔틴 제국과 가사니드 아랍인들 군대에 대항하여 그는 3000명의 그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카리드의 영리한 전투능력 덕택으로 그렇지 않았으면 치욕스러운 패배가 되었을 전투에서 무슬림 군대는 살아남았다. 카리드는 전투 도중에 칼 아홉 개를 부러트렸고 나중에 알라의 칼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바로 이 사건에 관하여, 비잔틴 측의 보고가 있는데 이 보고는 완전히 다른 기술을 하고 있다. 그것은 데오파네스(Theophanes)라는 비잔틴 수도사가 기록한 연대기이다.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무슬림 군대는 축제날에 현지 아랍인들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주교 대리 데오도루스(Theodorus)는 그들의 계획을 알고 현지 요새들의 수비대에서 군대를 모았다. 그는 무타의 무슬림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쫓아내면서 무슬림 지휘관들 가운데 세 명을 살해하였고 카리드 이븐 알 와리드만이 나머지 군대를 데리고 간신히 탈출하였다.
무타 전투는 무함마드의 도적떼들에게 패배였는데 왜냐하면 아라비아 부족 주드함(Judham)과 락햄(Lakhm)이 비잔틴 연합군에 속하였기 때문이었다.
630년에 무슬림들은 메카를 정복하기 위하여 메디나에서 전진하였다. 메카정복 과정에 카리드는 메카에 입성한 무슬림 군대 4개 중 하나를 지휘하였고 꾸라이시 기병대와 소전투를 하였다.
그는 후나인(Hunayn) 전투에서 무슬림 기병대 지휘관이 되었고 타이프(Ta'if) 포위에 참여하였고 그밖에 소전투를 하였다. 631년에 그는 무함마드의 마지막 순례(hajj)에 함께하였다.
카리드는 무함마드의 군대와 그의 직후 승계자인 칼리프 아부 바크르(Abu Bakr)와 우마르 이븐 알 카탑(Umar ibn al-Khattab)의 군대를 지휘하면서 군인으로서 그의 용기로 유명하다. 그는 숫자적으로 우세한 비잔틴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과 그들의 동맹군들과의 100번 이상의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에 많은 부족들이 메디나의 강압적인 통치에서 탈퇴하였다. 카리드는 수천명의 아랍인들을 학살한 리다(Ridda) 또는 배교전쟁에서 아부 바크르를 위하여 메디나 군대를 지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아파 자료들에 따르면, 카리드는 공격적인 전투를 선호하여서 기병들을 보내어 도망자들을 포위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였다.
그 기병대들 가운데 하나가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Malik ibn Nuwayrah)와 그의 가족을 붙잡아서 카리드에게 데리고 왔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슬림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군대에 있었던 메디나 사람들이 카리드의 무자비함을 거칠게 항의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카리드는 말리크를 배교자라고 선포하고 그의 처형을 명령하였다.
그 날 밤에 카리드는 말리크의 미망인 라이라 빈트 알-민할(Layla bint al-Minhal)을 강간하였는데 그녀는 그 당시 아라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카리드가 라이라를 강간한 것은 나중에 문제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라이라를 차지하기 위하여 카리드가 말리크를 살해하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리드는 그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아부 바크르에게 소환되었다.
***희생자들을 살해하고 그 동일한 날 밤에 그들의 부인들과 딸들을 강간하고 나중에 그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결혼이라고 부르는 무함마드의 순나를 카리드가 단순히 따르고 있음을 기억하라.***
말리크 사건 후에 칼리프 아부 바크르는 초기 이슬람 국가의 가장 강력한 위협인 또 다른 자칭 예언자 무사일리마(Musailima)를 제압하기 위하여 카리드를 보냈다. 카리드는 632년에 있었던 야마마(Yamama) 전투에서 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하였다.
무사일리마를 패배시킴으로 반란을 일으킨 부족들의 모든 저항이 거의 제압되었다. 꾸란을 암기하는 자들 수백명이 살해되어 그들만이 아는 모든 구절들이 그들과 함께 소실된 것이 이 전투기간 동안이었다.
새로운 칼리프 아부 바크르는 제국을 확장하기로 결정하였다.
페르시아에 대한 아랍의 정복이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의 가장 부유한 지방인 이라크를 정복하기 위하여 18,000명의 군대와 함께 카리드가 파견되었다.
633년 한 해 동안, 최고의 군사력의 결과로 무함마드의 아랍인들은 페르시아에서 이라크를 빼앗았다.
칼리프 아부 바크르는 그의 승리에 대하여 카리드 이븐 알-와리드를 축하하고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었는데 시리아 비잔틴 지방에 들어가 거기의 이슬람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의 시리아의 비잔틴 지방은 현대의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주거지역들, 레바논, 터키남부였다.
시리아 사막을 통과하여 카리드는 그의 군대 절반(9,000명)과 634년에 시리아에 들어갔고 거기서 네 명의 장군,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자르라(Abu Ubaidah ibn al-Jarrah), 야지드 이븐 아부 서피얀(Yazid ibn Abu Sufyan), 샤르지엘 빈 호산나(Sharjeel bin Hosanna), 아무르 이븐 알-아스(‘Amr ibn al-'As) 휘하의 23,000명의 강한 무슬림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634년 8월 22일, 다마스쿠스 포위 도중에 아부 바크르가 사망하였고 우마르가 그의 승계자가 되었다. 우마르의 첫 번째 움직임은 카리드를 지휘관에서 해임하고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자르라(Abu Ubaidah ibn al-Jarrah)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카리드의 해임에 관하여 오직 한 가지 알려진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의 병사들이 알라 대신에 승리를 카리드에 의존하는 것을 우마르가 두려워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우마르가 그를 최고 사령관에서 해임하였지만 카리드는 비잔틴-아랍 전쟁의 초기에 비잔틴에 대항하여 배치된 군대에서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로 남아있었다.
그의 지휘로 다마스쿠스가 635년에 함락되었고 로마 비잔틴 군대에 대한 중요한 아랍의 승리는 636년 야르묵(Yarmuk) 전투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전투로 인하여 Bilad al-Sham의 정복이 있었다.
아부 우바이다는 장래의 정복을 결정하기 위하여 카리드를 포함하여 그의 상관들과 미팅을 가졌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예루살렘 포위는 네 달 동안 지속되었고, 그 후에 그 도시는 항복하였지만 단지 칼리프 우마르 이븐 알 카탑 개인에게 항복하였다. 그 항복은 637년 4월에 있었다.
아랍인들 가운데 카리드의 명성이 너무 높게 되어서 시인들이 그의 영광스러운 업적에 관하여 찬송시를 낭송하였다. 그래서 칼리프 우마르는 그를 군대에서 제거하기 위한 설득력이 없는 핑계를 찾았다. 카리드는 메디나에 가서 우마르를 만났고 그가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하여 항의하였다. 우마르는 그를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다:
“당신이 하였소, 그리고 당신이 한 만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러나 그 일을 한 분은 사람이 아니오, 그 일을 한 분은 알라이시오......”
나중에 우마르는 카리드를 그가 해임한 것을 설명하였다:
“나는 그에 대한 나의 분노 때문에 또는 어떤 부정직함 때문에 카리드를 해임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그를 영화롭게 하고 잘 못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해임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의지하는 것이 두려웠다. 모든 일을 하는 분은 알라라는 것을 나는 사람들이 알기 원하며 세상에 잘 못된 것은 없어야 한다.”
그는 전투에서 순교자로 죽기를 원하였고 그가 침대에서 죽게 될 것을 알았을 때 실망하였다. 카리드는 자신 영혼의 모든 고통을 마지막에 고통스러운 한 개의 문장에 담았다:
“당신이 행한 것에 대하여 나는 무슬림들에게 항의한다. 알라에게 맹세하건데 당신은 내게 공정하지 않았다, 오 우마르!”
그것이 ‘좋은 무슬림들’이 언제나 그들의 고마움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자료출처 http://www.the-koran.blogspot.kr/2008/08/sword-of-allah-part-1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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