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이스라엘 분쟁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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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in 2006)
현대 아랍-이스라엘 분쟁은 그 지역이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2000년 전부터 유대인 조상들의 고향이었음에도 한 세기 이상 유대인 국가의 존재를 타협함에 있어서 아랍 측의 증오와 거만함과 거의 자살적인 거부감의 극치이다.
최초의 이스라엘이 건국된 3500년 전 이후로 그 지역에서 많은 다른 제국들이 들어오고 나갔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신성한 그 땅에서 항상 그 존재를 유지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중동의 대부분은 오토만 제국에 속하였다. 그 지역에 대한 무슬림의 통치는 무함마드의 군대가 7세기에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복속시킨 이후 단지 150년 동안 십자군의 저항을 제외하면 거의 계속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30년 전부터 팔레스타인이라 부르는 그 지역의 인구는 유럽과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의 유입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현대 시온주의 운동의 시작이 되었고 시온주의 자들은 이스라엘 땅의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 자신들이 할 일이라고 믿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터키 제국의 멸망으로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 다음 30년은 일반적으로 유럽과 러시아로 부터 의식 있는 유대인들이 땅을 사고 이주하는 것과 같은 시온주의자들의 정당한 노력으로 나타났다. 힘의 균형이 세계 가운데 이 지역에서 수 세기동안 제 3등급의 딤미들(dhimmis; 이슬람이 지배하는 지역에 사는 복속된 사람들로 굴종적인 삶을 산다)로 대우받아온 유대인들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하자 그 지역의 긴장이 점차적으로 악화되었다.
1937년에 유대인 이민을 제한하려 하였고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전형적으로 아랍인들을 편들었던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분할하고 그 땅의 80%를 아랍인들에게 주는 제안을 아랍인들에게 하였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그 계획을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관용이 상호간에 유익함에도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증오와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무슬림 공동체의 그 많은 놓쳐버린 기회들 가운데 이것이 첫 번째 기회였다.
시온주의자들이 그 지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가지게 되자 그들의 관심은 당시 이스라엘 국가를 만드는데 중요한 방해자로 여겨졌던 영국으로 돌려졌다. 보다 더 강경노선의 유대인 거주자들은 영국에 압력을 넣기 위해서 그 지역의 팔레스타인 군대와 민간인들을 목표로 테러작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중동역사에 있어서 보다 역설적인 장들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는데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유대인 테러리스트 집단에 의하여 처음 사용된 이 작전들의 대부분은 비록 유대인들이 가능한 많은 민간인들을 살해하기 위한 지하드 전사들과 같은 집요한 추진력은 부족하였으나 짐작하건데 같은 목표인 민족자결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중에 이스라엘 국가를 대항하여 사용되었다. 둘 다 전에 이르군(Irgun) 테러리스트였던 베긴과 샤미르는 나중에 이스라엘 수상까지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10대 1의 차이로 영국에 대항하여 나치를 지원하였고 반면에 유대인들은 연합군을 지원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정신적 지도자는 사실상 전쟁하는 기간을 베를린에서 보냈고 거기서 그는 중동의 유대인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히틀러와 직접 같이 일했다.
전쟁과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끝난 다음 UN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분할계획을 만들었고 그 계획은 현재 이스라엘이 지금 점유하고 있는 것 보다 다소 작은 가장자리에 60만 유대인들을 위한 이스라엘 국가를 만드는 것 이었다. 그 결의안이 통과되었지만 협상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과 주변의 아랍 국가들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어설프게 단결된 시도로 5개 아랍 국가들은 그 신생 국가를 공격하였고 1947년 말부터 1949년 봄까지 전쟁을 계속하였다. 아랍국가 각자는 다른 국가와 전략적으로 협동하기 보다는 자국을 위하여 땅을 얻는데 주요 관심이 있었다. 그 당시에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데 진정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우수한 조직력과 군사훈련으로 단결된 것을 보면 이것은 4천만 아랍인들의 엄청난 숫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승리를 의미하였다.
그 분쟁의 결과로 약 70만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이주되었다(대부분 대규모 탈출을 통하여 그러나 일부는 아랍과 유대인 군대의 강요에 의하여 이주하였다). 약 15만 팔레스타인들이 돌아왔고 아랍인 이스라엘 국민이 되었다(그들은 현재 이스라엘 인구 650만의 약 13%를 구성한다). 그 새 국가는 1937년 UN 결의안이 요구한 것 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다. 서안지구(이스라엘의 동부지역과 요단강의 서안 사이에 끼어 있는 지역)가 요르단 지역이 되었고 예루살렘 시가 포함되었다(아래 지도를 보라). 가자지구(지중해에 연한 작은 직사각형의 땅)는 이집트에 속하게 되었다. 두 지역에 많은 수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있다. 난민켐프들은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에도 설치되어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무슬림 국가들은 수백 수천의 유대인 시민들의 재산을 빼앗고 몰수하여서 그들도 난민이 되었다. 중요한 문화 또는 언어의 변동 없이 단지 한 지역에서 (보통 단지 몇 마일 떨어진)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는 달리 이 유대인들은 훨씬 더 도전적인 환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불만에 집착하여 구호품으로 살기보다는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성공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그들의 성공과 자손들의 성공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였더라면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쉽사리 이루어질 수 있었다.
자극적인 미사여구 말고는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위해서 해준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전쟁을 시작한 다음에 지는 편이 종종 부담하는 전쟁배상금을 그들은 지불하지 않았다. 사실 아랍국가가 이스라엘이 하는 만큼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30년 전부터 이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이주한 아랍국가 내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통합하려는 많은 노력도 없었다.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상황을 단번에 모두 쉽게 해결하였을 쫓아낸 유대인들에게서 몰수한 그 많은 재산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다시 정착하게 하는데 사용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아랍 독재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자유 민주국가 이스라엘을 정치적 모범으로 보다는 부랑자 집단으로 보는 것이 그들에게 더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냉소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혹독한 비난을 선동하였다. 가난이 지배하고 잠재성이 버려졌던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농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극도의 적대감까지 더해져서 꾸란에서 말하는 대로 유대인들이 “원숭이와 돼지”의 후손이라고 믿었던 현지인들이 시샘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그 지역에서 지배적인 아랍 권력인 이집트와 1956년 시나이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이스라엘 자체에 환심을 사지 못하였다. 이집트 군대를 시나이 반도로부터 그리고 수에즈 운하 건너편으로 철저하게 밀어낸 다음에 이스라엘은 국제적 압력에 약해져서 그 땅을 다시 양도하였다. 그 전쟁에 대한 이스라엘의 구실은 국경건너로 부터 테러리스트 유입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1967년에 시리아와 요르단과 동맹을 맺은 이집트 지도자 나세르는 이스라엘과의 국경을 따라 불법적인 대규모의 군대를 배치하기 시작하였고 중요한 이스라엘 항구를 봉쇄하였다. 나세르의 비정상적이고 호전적인 미사여구와 같이 이루어진 이 행위는 이스라엘이 다시 국경 3곳에서 즉시 공격받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임박한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공군은 1967년 6월 5일 아침에 이집트 공군기지에 대하여 멋진 선제공격을 하였다. 이집트인들이 먼저 공격을 하였다면 전쟁은 다른 양상으로 되었을 것이지만 전과 같이 그 전쟁은 행동개시 한 날의 처음 몇 시간 안에 결정되었다. 이집트 공군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지상군에 대한 지원이 없어서 그들은 신속히 후퇴하였다. 시리아와 요르단은 약간은 마지못해서 전쟁에 참여하였고 우리가 “6일 전쟁”으로 아는 것에서 그들도 신속히 후퇴하였다.
그 전쟁의 즉각적인 결과는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의 3배 이상의 엄청난 부동산을 얻은 것이다. 얻은 것의 대부분은 인구가 희박한 시나이 반도안의 땅과 수에즈 운하의 동안까지 전 지역 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지역은 골란고원(전 시리아 지역), 서안지구(전 요르단 지역), 그리고 가자지구(전 이집트 지역) 이다. 이 영토 획득과 함께 백 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전 거주자들과 난민들)과 예루살렘시를 얻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강경노선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작전의 멋진 성공에 들떠서 땅을 차지하거나 구매하고 주거지역을 건설하면서 점령한 지역에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전쟁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고통을 감수하였던 이스라엘 정부의 명백한 승인으로 행하여진 것이 아니었지만 정부가 효과적으로 정착촌 건설을 막기 위해서 관여하였던 것도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점령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영역내의 현재 이러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존재는 영원한 평화에 대한 주요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점령한 땅”이 없었던 1967년 전쟁 몇 해 전에 생겨났다는 것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팔레스타인의 목적은 (그들의 말에 따르면)“유대인들을 바다로 몰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흥미롭게도 그들의 선언의 이 부분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았다.
1973년에 이집트와 시리아는 좀 더 성공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지만 노력에 비하여 얻은 것이 거의 없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지속된 평화협정은 1979년 켐프데이비드 협정기간 동안 주로 안와르 사다트의 평화에 대한 바람과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반환과 미국 대통령 지미카터의 평화협정을 성공시키기 위한 끈기 있는 노력의 결과로 성취되었다. 시리아는 (아직도 테러니스트 집단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지만)골란고원을 반환하는 제안으로 나중에 위로되었고 요르단은 곧 서안지구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포기하였다.
위로 받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일방은 수 천명의 무고한 생명들과 지나간 시간동안 수십억 달러를 희생하며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조잡한 테러리스트 작전들을 해온 팔레스타인 사람들 자신이었다. 테러는 대부분 야세르 아라파트의 지도하에 망명해 있는 지도부에 의하여 지휘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간디 또는 1960년대의 미국 시민권 지도자들을 따라서 대신에 평화롭게 항의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더라면 그들이 정치적인 국가와 국제적인 존중을 빠르고 쉽게 획득하였을 것이 확실하다.
여러 가지 점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단지 하나였다. 1967년 전쟁발발 이후에 이스라엘은 종종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그 지역에서 경제정책을 결정하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농산물과 경쟁하지 못하게 하는 농업 규정들과 이스라엘의 산업적 지배를 확실하게 만들었던 그러한 다른 규정들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 지역과 좋은 땅의 대부분에 대한 전력 배전망까지 통제하였다. 예를 들면 가지지구는 아랍 폭도들이 1929년에 원래 있던 유대인 거주자들을 몰아낸 이후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110만 명의 조밀한 인구를 가진 그 땅에서 7천명의 유대인 정착자들은 결국 그 땅의 20%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계 국가들의 의식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자치에 대한 요구이다. 이것은 (가끔은 시기상조로)독립을 보장하는 국제적 공감을 환영하였던 식민지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 의하여 과거에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청원이다. 아랍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 자신들의 국민들에게 그 같은 자유(난민 켐프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것을 포함하여)를 허용하지 않았기에 그 문제를 보다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David Horowitz가 지적하였듯이 아마도 현재 중동에서 모든 아이러니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아랍인 이스라엘 국민들이 53개 무슬림 국가들 가운데 어느 나라에서 아랍인들이 누리는 것보다 더 많은 사회적, 법적, 정치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더 큰 그림을 보면 표면적으로 아랍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지원하는 속셈에는 민주주의적 자유에 대한 호기심 있는 열정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아랍인들은 현재 중동 모든 땅의 99.9%를 지배하며 이스라엘의 모든 지배지역은 단지 켈리포니아의 San Bernardino 군 규모의 절반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지역의 무슬림들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존재에 관한 것 이라기보다는 아랍인들에게 필요한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이 땅의 사람들이 지지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공감하는 사람들까지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의 40년 동안 “난민들”로 살고 있는 같은 아랍 국가들에서 영원한 영주권을 가지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정치적 혼란의 목적을 위하여 불만의 씨가 영속화되는 것을 너무도 기꺼이 방관할 뿐인 무슬림 국가들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꼭두각시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PLO는 1991년 쿠웨이트에 대한 사담 후세인의 잔혹한 침공과 합병을 지지함으로 결정적인 실수를 하였다. 이라크 독재자는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아랍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는 전통적 선동행위와 함께 혼합하였다. 야세르 아라파트에 있어서 문제점은 아무도 그것을 구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걸프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의 배신에 정신을 차리고 거칠게 반응하였다. 이전에 팔레스타인 지원국이었던 쿠웨이트 한 나라에서만 그 전쟁이 끝나고 후원금에서 수입 손실과 40만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쫓겨났다.
PLO는 1993년에 완전히 파산 직전이었고 이것은 아라파트로 하여금 1993년에 이스라엘과 협상테이블에 나타나게 만들었다. 단계적인 자치와 교환하여 이스라엘이 존재할 수 있는 권리가 마침내 인정되었다.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뒤에 서서 양측이 악수하도록 보이게 유도해낸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에 의하여 마련된 백악관에서 사진 찍는 부분에서 협정 날인이 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이스라엘 수상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게 만든 클린턴에 대한 유산 정의의 순간이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망명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팔레스타인 정부의 수반으로 돌아왔다. 이스라엘은 아라파트의 경찰력에 무기를 공급하였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비-정착지역으로부터 철수하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들의 경제와 산업기반을 건설하고 그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완벽한 기회가 주어졌다. 미래는 밝고 희망적이었지만 어느 때처럼 세계는 보이지 않는 무슬림들의 증오를 과소평가하였다.
수 십년 동안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가장 소름끼치는 종류의 테러를 선동하고 분노를 조장한 다음에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폭력에서 간단히 돌아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은 보다 급진적인 팔레스타인 공동체, 특히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는 이스라엘과 평화를 원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경제의 80%를 장악하지만)그들은 이스라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원한다.
이 세력들은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그리고 그들의 국민들에게 대항하여 양측을 상대로 하여 테러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들의 협박작전은 공동체 내에서 그들에게 중요한 지원을 하게 만들었고 온건한 자들이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평화문제를 통제하게 만들었다. 팔레스타인 정부와 이스라엘간의 협정이 임박할 때마다 대규모 민간인 생명 손실이 이스라엘 측의 군사적 대응을 자극할 것이라는 바람으로 새로운 테러리스트 작전이 시작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침공 다음에는 팔레스타인 지도부가 협상 테이블에서 철수하도록 압력을 넣으면서 보통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선동할 것이다.
기묘하게도 이 폭력의 순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 자신들에게 손해를 주는데 대부분 기여하였고 특히 경제적 상태에 기여하였다. 학자 Benny Morris는 가장 최근의 인터파다(Intifada; 1987년에 시작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에서의 팔레스타인인의 반이스라엘 투쟁)의 처음 4달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5억 달러 이상의 수입손실을 가져왔고 실업률은 12%에서 40%로 급증하였다는 것을 주목한다. 국제사회로부터 원조는 의존성을 조장하고 일하는 동기부여를 감소시켰고 미래 세대를 어둡게 하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국제적 동정은 거의 반-유대주의에 의하여서만 유지될 정도로 감소하였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강력한 동기인데 특히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꾸란에 근거한 무슬림 세계에서 그렇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동정 뒤에는 그들이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2001년 이후로 지하드의 이름으로 수단 이슬람 공화국에 의하여 짐승같이 취급된 수 백만의 쫓겨나고 강간당하고 살해된 Darfuran족들에 대하여 거의 관심이 없는 것 이상으로 더 큰 냉소적인 사고방식의 증거는 없다.
야세르 아라파트의 개인적인 신뢰성은 이스라엘 국민들이 예루살렘이 팔레스타인 수도가 되는 것을 포함하여 (추가적인 보상과 함께) 그의 요구 95%를 들어주는 데 동의한 1999년에 시험대에 올랐다. 전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대신에 인터파다와 2004년 그의 죽음 전에 고귀한 명성의 손실을 선택하면서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양측이 자신들의 극단주의자들을 데리고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 측에서 본 이스라엘 공동체 부분에는 제멋대로 하는 테러와 같은 위임은 거의 없었다. 1994년 한 정착자에 의한 헤브론 모스크 공격은 유대인 공동체의 일부 정통파 구성원들에 의하여 기념되고 있지만(그리고 무슬림 옹호자들에 의하여 자주 인용되고 있지만) 수년 동안의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파타(Fatah)에 의하여 일상적인 배경이 된 폭탄테러와 가정집 침입에 비교하면 아직도 대부분이 유일한 사건으로 여기고 있다.
테러리스트 집단을 그대로 남겨두는 팔레스타인 집권당(아라파트의 al-Fatah 조직)의 결정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부패와 공적자금 남용뿐만 아니라 조직이 이스라엘 민간인들에 대하여 수 백건의 비인간적인 공격을 지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2006년 1월에 하마스가 선거에서 승리하는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가자지구를 그들에게 넘겨주고 단지 몇 달 만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테러리스트 집단이 통치하도록 선거한 사실은 그 사람들의 사고에 대한 볼륨을 말해준다. 양측사이의 도덕적 동등성을 나타내기 위해 “폭력의 순환”과 같은 용어들을 자주 사용하지만 양측이 오늘날 그 분쟁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전혀 비슷한 것이 없다.
평화는 양측의 참여를 요구한다. 일방이 테러를 조장하고 자신의 말을 계속해서 지키지 않을 때 협상은 불가능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의 불만보다 그들 자녀들의 미래를 중시할 때 평화는 올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thereligionofpeace.com/Articles/MiddleEas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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