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라비아의 역사와 고고학은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에 메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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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비문 연구도 고대 메카를 부정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다르게 주장하지만, 결국 메카가 건설된 장소를 포함하는 홍해 연안의 땅은 기원전 3세기에 그 지역을 통해 육상 무역로가 생겨나기 전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 나는 서기 4세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아라비아의 나라와 도시들의 기록에서 메카의 부재를 언급했다. 나는 또한 어떻게 네 개의 외부 제국이 아라비아 북서부와 중서부를 점령했으면서도 그들의 기록에서 메카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는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이제 메소포타미아 문명, 특히 아시리아인들의 기록에서 메카가 어떻게 빠져 있는지 보여주겠다. 나는 아시리아인들을 기원전 8세기와 7세기에 아라비아 북서부와 중서부를 차지한 네 개의 제국 중 하나로 언급했다.
메카는 기원전 2천년기의 기록에서 없다.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은 이집트와 시리아와 같은 중동의 도시들과 각각의 왕국들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동부 아라비아에 있는 딜문(Dilmun)이나 마간(Magan) 같은 왕국들을 똑같이 알고 있었다. 이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들은 비문과 기록으로 알려졌다. 이전에, 나는 메소포타미아의 문명과 아라비아 동부의 문명의 연결고리에 대해 언급했다. 그것은 기원전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를 들어, 오만이라고도 불리는 마간은 기원전 28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악카드(Akkadic) 비문에 언급된다.[46] 그 당시에 존재했던 어떤 서부 아라비아 왕국이나 도시도 메소포타미아 비문에 분명히 언급되었다. 역사는 예멘과 같은 남서부 아라비아의 왕국들이 사바 왕국으로 기술되었고 사바 왕국은 기원전 13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어떤 학자들은 기원전 12세기라고 주장하고, 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1세기라고 말한다. 어쨌든 기원전 14세기에 이집트인들은 그 지역에 어떤 왕국이나 도시가 세워지고 알려지기 전에 예멘을 언급했다. 따라서 아라비아 남서부에 관한 메소포타미아 비문의 침묵은 그 지역에 자신들을 알릴 왕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북부의 도시들은 기원전 10세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예멘 왕국들이 아라비아 북부의 오아시스를 통해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소통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에는 데단(Dedan), 케다르(Qedar), 그리고 다른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다른 도시들과 더불어 야트립(Yathrib)이라는 도시가 건설된 것은 기원전 6세기 이후였다. 무슬림들은 다르게 주장하지만, 결국 메카가 건설된 장소를 포함하는 홍해 연안의 땅은 기원전 3세기부터 그 지역을 통과하는 육상 무역로가 개설되기 전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 기존에 존재했던 내륙 무역로와 평행선을 이루는 이 해안 무역로는 기원전 8세기에 설립된 예멘과 아라비아 북부의 오아시스를 연결했다. 이 고대 시대에 메카는 아라비아 무역로를 따라 있는 것으로 알려진 많은 도시들 중에 언급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리학자들과 아라비아 북부와 중부를 차지한 다른 나라들을 연구할 때 이것을 보았다.
우리는 남서부 아라비아, 주로 예멘, 그리고 예멘이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같은 중동 왕국들과 교역하면서 북부 그리고 중앙 서부 아라비아로의 확장하는 정확한 역사적 그림을 그렸다. 이스마엘의 어머니인 하갈이 메카를 여행했고, 아브라함도 메카를 방문해 그곳에 사원을 지었다는 코란의 주장을 반박하려면 역사적으로 정확한 그림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서부 아라비아의 역사에서 아브라함을 흥미롭게 할 만한 도시는 없었으며, 아브라함, 이스마엘, 하갈 시대에 그 지역을 여행하는 캐러밴도 없었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3천년기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왕국들과 함께 이라크 북부에 존재했기 때문에 고대 아시리아 비문의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과 비문에는 서부 아라비아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그 당시 아라비아 서부에는 왕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자. 아시리아는 기원전 911년부터 891년까지 통치한 아다드-니라리(Adad-Nirari) 2세 치하에서 강력해졌다. 그의 통치하에서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 아나톨리아, 시리아의 일부를 점령했다. 아다드 니라리 2세에 이어 투쿨티-니우르타(Tukulti-Ninurta) 2세가 기원전 890년부터 884년까지 통치했다. 그 후 아슈르나시르팔(Ashurnasirpal) 2세는 기원전 883년부터 859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지중해까지 아시리아의 지배를 확장했다.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아시리아의 세력권이 아라비아에 접해 있는 동안 아라비아 남부와 북부는 이 왕들의 통치기간 동안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시리아 기록에서 아라비아에 관한 비문은 살만에세르(Shalmaneser) 3세가 통치할 때에서야 나타났다. 살만에세르 3세는 기원전 858년부터 824년까지 통치했다.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서야 아라비아 북부의 도시들이 오아시스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이 비문들을 보자. 살만에세르 3세는 쿠르크(Kurkh)의 모놀리스(Monolith) 비문이라고 불리는 비문에서 아시리아인들이 카르카르(Qarqar) 전투에서 많은 왕들과 동맹을 맺었다고 언급했다. 그가 동맹을 맺은 왕들 가운데는 다마스쿠스의 왕 하닷에셀(Hadadezer), 이스라엘 왕 아합(Ahab)과 낙타 천 마리를 거느린 아랍 왕 긴디부(Gindibu’)가 있다.[47] 기원전 744년부터 727년까지 통치한 티글라트-필레세르(Tiglath-Pileser) 3세의 비문에서도 아라비아 북부의 왕국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이 비문들, 특히 아시리아의 옛 수도 칼라(Calah)라고도 호칭되는, 님루드(Nimrud)에 있는 살만에세르(Shalmaneser) 3세 궁전의 벽에서 제거된 연대기에서 우리는 기원전 738년경에 "아랍의 여왕" 자비베(Zabibe) 여왕이 살만에세르 3세에게 공물을 바쳤음을 알 수 있다. 자비베 여왕의 공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란에서 발견된 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비석은 케다르인들(Qedarites)이 아랍인들과 분리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스마엘 부족인 케다르인들이 다른 아라비아 부족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이스마엘족으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케다르인들이 다른 부족들과 섞이면서, 그들은 독립성을 잃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침략자들도 케다르인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비문에는 삼시(Samsi)라는 이름의 또 다른 아라비아 여왕이 진압되었다는 언급도 있다.
아라비아 북부에 있는 케다르 왕국은 기원전 8세기까지 등장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비문에는 아라비아 북부의 왕국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기원전 858-824년 살만에세르 3세의 비문에는 "아랍인 긴디부(Gindibu, the Arab)"가 언급되어 있다. 긴디부는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가한 다른 왕들과 함께 이스라엘 왕 아합과 다마스쿠스 왕에게 낙타 천 마리를 빌려준 아라비아 부족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이어서 기원전 721년부터 705년까지 아시리아를 통치했던 사르곤 2세를 보자. 이집트는 그가 정복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또한 아시리아의 바빌로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했다. 사르곤 2세 시대부터는 아랍인에 대한 정보가 많아졌다. 사르곤 2세의 비문은 사바 왕을 포함한 여러 왕들이 아시리아에 바친 공물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유명하다. 또한, 비문에는 아라비아 북부의 몇몇 부족들이 언급되어 있다.
사르곤 2세에 이어 기원전 704년부터 681년까지 통치한 센나케립(Sennacherib)의 비문이 나온다. 센나케립은 바빌론을 파괴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센나케립 시대에 유명한 비문은 허퍼 레터스(Herper Letters)로, 센나케립와 아슈르바니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센나케립에 이어 680년부터 669년까지 통치한 에살핫돈(Esarhaddon)의 비문이 나온다. 그리고 나서 기원전 668년부터 627년까지 다스렸던 아슈르바니팔(Assurbanipal)의 비문이 나온다. 아슈르바니팔은 엘람(Elam), 이집트, 리디아(Lydia)를 물리쳤다. 아랍인들과 관련된 아슈르바니팔의 비문은 기원전 6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48]
아랍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서신들도 많이 있다. 그 중에는 앞에서 언급한 허퍼 레터스(Herper Letters)와 님루드 레터스(Nimrud Letters)가 있다. 님루드 레터스는 기원전 8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중앙 아라비아의 바주(Bazu) 땅에서 일어난 에살핫돈(Esarhaddon)의 원정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바빌로니아 연대기와 같은 다른 자료도 가지고 있다.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또한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바빌로니아인들의 공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보니두스 연대기는 나보니두스의 아라비아 원정과 테이마(Teima)에서의 체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기록들이 기원전 9세기 말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아라비아의 서쪽, 북쪽, 그리고 중부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을 본다. 이것은 아라비아 그 지역의 부족들과 왕국들, 그리고 통치하는 도시들을 아시리아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에게 노출시킨 긴 기간이다. 그러나 메카나 이슬람 전통이 메카에 살았다고 주장하는 부족에 대한 언급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비문은 아라비아의 이 지역과 이 두 메소포타미아 국가들 사이의 5세기 동안의 접촉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들의 기록은 기원전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부 부족과 사바 사이에는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 기록에 언급된 메카 같은 도시가 없다. 각각의 세기에 많은 기록들이 아라비아 서부와 북부의 나라들과 부족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아무도 메카 같은 도시를 언급하지 않는다.
메카는 아시리아의 정치, 군사, 상업 현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서부 아라비아의 다른 부족들은 아시리아 기록에 언급되어 있다.
기원전 8세기 후반, 아시리아는 공물을 바침으로써 아시리아의 점령을 피하려고 했던 아라비아 부족들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다른 아라비아 부족들은 향신료 경로를 따라 그들의 무역이 보호되기를 원했다. 이 길은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있는 시나이와 요르단 남부의 영토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연결했다. 서부 아라비아의 모든 왕국들과 도시들은 그들의 부와 생계를 위해 무역에 의존했다. 이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아시리아의 왕들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 지역의 도시들은 농업을 지탱할 비가 없고, 식량을 얻기 위하여 교역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특히 중요했다. 메카가 건설된 지역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지역 중 하나다. 그러므로, 메카는 서기 4세기에 무역의 도시로 시작되었다. 그것의 존재는 특히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같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 국가들과의 무역의 지속성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아라비아의 상업 도시들의 주요 관심사는 그들이 무역을 하는 이 나라들과 관계를 구축하고 시장을 찾는 것이었다.
아시리아인들은 케다르인들(Qedarites)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케다르인들은 기원전 738년경에 티글라트-필레세르(Tiglath-Pileser) 3세에게 공물을 바친 역사적으로 기록된 많은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다.[50] 사바의 왕들은 그들의 무역을 보장받기 위해 또한 아시리아인들에게 공물을 바쳤다. 그들의 영향력을 보장받고 이 지역에서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아라비아 부족들은 서로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종종 전쟁과 원정으로 이어졌다.
고대부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시대까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지배했던 사람들 사이의 무역-관계 기록에는 메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메카는 교역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시대 아라비아 서부의 부족들과 도시들을 기록한 어떠한 동맹에도 없다.
기원전 744-727년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비문에서, 우리는 그가 많은 아라비아 부족들과 싸운 전쟁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북부 아라비아에서 "아랍의 여왕"인 삼시(Samsi)를 상대로 한 자신의 작전을 언급하고 있다. 다른 비문들은 아시리아인들이 아라비아 부족에 대항하여 싸운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티글라트-필레세르는 초기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 명의 전사들이 내 발에 절을 했다. 내 선조들 중 아무도 몰랐고, 멀리 떨어진 해가 지는 나라들의 경계에서 마사(Massa), 테이마(Teima), 사바(Saba), 하야파(Hayappa), 바다누(Badanu), 핫테(Hatte), 이디바일루(Idiba’ilu)[이디바일라아; I-di-ba’-il-a-a]의 사람들은 나의 군주권을 찬양했다.
....낙타, 암낙타, 모든 종류의 향신료, 하나 같이 그들의 조공을 내 앞에 가져왔고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이디빌루(Idibi'ilu)를 이집트 입구의 수호자로 임명했다.[51]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비문에 언급된 사람들의 목록을 분석하면서, 우리는 그들이 마사, 테이마, 사바라는 이름으로 앞에 나오고 있음을 발견한다. 마사는 시리아-아라비아 사막에 존재했던 이스마엘족으로 알려져 있다. 테이마는 아라비아 북부의 부족이자 도시였다. 사바는 기원전 8세기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때 예멘을 지배했던 왕국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많은 학자들은 바다누를 타무드(Thamud)와 사바의(Safaitic) 비문에서 발견되는 브든(Bdn)의 부족이라고 생각한다.[52] 내가 조사한 바로는 플리니(Pliny)가 타무드 부족의 지역에 위치한 바다나타(Badanatha)라는 도시를 언급했다는 것을 알아냈다.[53] 바다나타는 기원전 8세기에 타무드 족과 통합되고 바다누 부족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바다나타라는 도시가 건설된 곳과 같은 지역에 있었다고 추측한다.
이디바일라아(I-di-ba’-il-a-a) 부족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아드빌(Adbeel) 부족이라고 여겨진다. 아드빌은 이스마엘의 아들 중 한 명이다. 티글라드-필레세르 3세 비문에서는 그가 이 부족을 이집트 입구의 관리인으로 임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문에는 "나는 이디비일루(Idibi’ilu)를 이집트 입구의 수호자로 임명했다."라고 쓰여 있다. 이 비문은 이 이스마엘 부족이 기원전 8세기경에 시나이 반도에 여전히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비문에 대한 연구는 창세기에서 언급된 부족과 국가의 기원에 대해 말할 때 성경의 정확성을 확인시켜준다. 아시리아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발음하는 대로 부족 이름을 적는 것은 논리적이다. 따라서, 아드빌 (I-di-ba’-il-a-a; 이디바일라아로 쓰여짐)과 사바 (Saab’-a-a; 사바아로 쓰여짐)가 있다.
기원전 8세기와 7세기의 비문에서 우리는 모세가 성경에 쓴 많은 부족들을 만난다. 하지만, 우리는 메카나 이슬람 전통이 아브라함 시대까지 메카에 살았다고 주장하는 주르훔(Jurhum)과 같은 다른 부족들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볼 수 없다. 기원전 15세기 이후 성경에서 언급된 많은 부족들이 나중에 성경의 다른 책들에서 다시 언급되어 그들의 존재는 물론 그들의 역사적 활동까지 조명하고 있다. 그런 부족 가운데 하나가 에바(Ephah)인데, 사라가 죽은 뒤에 아브라함이 아내로 삼은 케투라(Keturah)와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서 나온 부족이다.
학자들은 티글라드 필레세르 3세와 사르곤 2세의 비문에서 언급된 하야파(Hayappa) 부족이 에바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인 셉투아긴트(Septuagint)에서 그 부족은 가이파(Ghaiphah)라고 호칭된다. 창세기에 케투라의 아들들의 족보가 나오니 성경이 이 부족의 위치를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에바는 미디안 자손의 조상인 미디안의 장남이다. 에바는 미디안 사람 가운데서 가장 강한 부족이 되었는데, 종종 모든 미디안 사람을 대표하는 부족이 되었다. 미디안인들은 아카바 지역 근처의 아라비아 북서부에 살았다. 그들은 기드온 시대에 이스마엘 부족과 연합하였고, 기원전 1170년경에 미디안 사람들과 기드온의 전투가 벌어졌다. 요르단 남쪽의 네게브시나이와 아라비아 북부의 많은 지역에서 미디안 토기가 발견되었다. 남쪽으로 테이마까지 발견된다. 테이마의 미디안 토기는 기원전 13세기 초에서 기원전 12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4] 테이마 남쪽에는 미디안 토기가 없다. 이는 미디안인과 에바가 아라비아 중서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한 집단이 된 에바와 미디안을 본다. 아사야서 60장 6절에서 우리는 읽는다: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에바는 아라비아 북서부 아카바 만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이 구절은 에바가 이곳에서는 스바(Sheba)라고 불리는 예멘의 사바와 팔레스타인 사이의 무역에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사야가 예언을 시작한 것은 기원전 739년 웃시야 왕이 죽은 해이고, 기원전 745년 디글라드필레세르 3세가 앗시리아 왕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성경은 에바의 존재를 기원전 8세기경 사바와 이스라엘 사이의 교역하는 사람들로 확인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사바에 대해 읽는다. 일부 학자들은 아라비아 북쪽, 데단 지역에 사바 부족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사바인들이 욥의 아들들을 급습하여 그의 종들을 죽였다는 욥기 1장 15절을 근거로 가설을 세운다. 다른 학자들은 사바가 예멘 사바의 북쪽 식민지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성경 구절들은 예멘 사바의 존재를 보여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시바의 여왕이 남쪽의 가장 먼 지역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마 12:42). 예레미야 6장 2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도 사바에 대하여 말하는 일종의 시적 유사성을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그곳을 유향의 기원으로 묘사하는데, 역사적으로 예멘의 사바가 유향거래로 유명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먼 나라라고 묘사한다. 욥기 자체에서도 사바는 여행객이 오는 나라로 다시 언급되는데, 욥기 6장 19절에서 "데마(테이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라는 구절을 본다. 예멘의 사바인들은 사막을 넘어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 지중해 국가까지 캐러밴을 대동한 상인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욥기 1장은 사바인들이 욥의 소유물을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바인들은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사막에 위치한 북부 베두인 족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두 번째 아내 케투라(Keturah)의 자손이다. 다른 학자들은 욥에 언급된 사바인들이 향신료 무역로를 통제하려고 했던 예멘 출신 사바인들의 식민지였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티글라드-필레세르 3세의 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아라비아 북부와 시나이 지역이 연결된 욥이 살던 곳에 이르렀다. 비문은 티글라드-필레세르 3세가 10,000명의 사바 전사들이 그의 발 앞에 절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종류의 향신료”를 조공으로 요구하여 향신료 무역 경로상의 사람들, 특히 사바와 테이마와 에바를 상대하였는 것을 확증한다. 이 세 부족은 향신료 육로를 통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그들의 영토가 외진 곳이며, 그의 전임자들 중 누구도 이 곳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한 비문에서 "나는 마사, 테이마, 사바 사람들이 내 발에 절을 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아시리아인들이 이들 부족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음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사바인들이 전쟁에 얼마나 많이 참여했는지는 비문으로는 명확하지 않다. 사바인들이 예멘의 사바의 식민지였는지, 아니면 북쪽의 베두인족이었는지는 규명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사바의 왕들이 나중에 아시리아 왕들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그 지역에서 아시리아인들의 패권을 인정했다는 증거이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무역이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있는 땅을 통과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
기원전 744년부터 727년까지 통치한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당시의 이 역사적 그림을 통해, 우리는 아라비아 서부의 상업, 정치, 군사 현장을 지배했던 부족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발견한다. 우린 케다르가 아시리아인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보았다. 미디안 지파가 지배하는 에바가 조공을 바치는 모습도 보았다. 게다가, (기원전 721년부터 705년까지 통치한)사르곤 2세 10년 후에 나타난 부족인 타무드와 연합된 바다누 부족이 조공을 바쳤다. 그리고 우리는 테이마를 찾았고, 마침내 예멘을 지배했던 사바 부족을 찾았다. 또한 사르곤 2세에 대한 중요한 기록들을 살펴본 결과 다른 부족들도 많이 발견되지만, 북서부 부족과 사바 사이에 메카 같은 도시가 있다는 언급은 없다. 또한 우리는 이슬람 전통이 메카에 살았고 서부 아라비아의 지배적인 부족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주르훔과 같은 다른 부족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메카는 기원전 제1천년기 후반기 고전 기록에 없는 것처럼 기원전 제1천년기 초의 국가들의 기록에는 없다. 서부 아라비아의 바다누 부족 그리고 다른 부족들과 같이 덜 중요한 부족들이 아시리아인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는데 이슬람 전통이 신앙과 패권의 중심으로 만든 도시를 까먹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아시리아의 지도자들은 고대 기록에 군대와 상업의 움직임을 기록했지만, 메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무슬림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에 도전할 필요가 있고, 그들이 종교적 소망의 기반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르곤 2세의 지배와 아라비아
사르곤(Sargon) 2세 시대에 메카가 존재했다면 사바 등 여러 아라비아 부족과 함께 언급되었을 것이며, 모두 그 시대의 비문에 언급되었을 것이다.
사르곤 2세는 아시리아의 가장 위대한 왕들 중 하나였다. 살만에세르(Shalmaneser) 5세의 후계자로서, 그는 기원전 722년부터 705년까지 통치했고, 티글라드-필레세르 3세에 의해 만들어진 정복지를 강화했다. 블레셋(Philistia)과 바빌로니아와 쿠르디스탄(Kurdistan)과 이스라엘이 그가 정복한 땅 중 하나였다. 기원전 717년, 그는 히타이트(Hittite) 도시 카르케미시(Karkemish)의 왕을 폐위시키고 그 도시를 아시리아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는 아르파드(Arpad), 다마스쿠스, 하맛(Hamath)과 같은 여러 도시에서 반란을 진압하였고, 이 반란을 지원한 이집트인들의 계획을 물리쳤다. 한 나라를 정복한 후, 사르곤은 주민들 중 일부를 추방하고 나머지 주민들과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섞었다. 사마리아는 이것의 한 예이다. 사르곤 2세는 사마리아에 사는 이스라엘 민족을 아시리아 북부로 추방한 뒤 자신의 국경을 위협하는 아라비아 부족들을 사마리아로 데려와 살게 하였다.
사르곤의 궁전과 두르 샤루킨(Dur Sharrukin)의 수도를 발굴한 결과 사르곤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 연대기에 기록된 사건들 중에는 타무드, 마르시마니(Marsimani), 에바, 이바디디(Ibadidi)와 같은 여러 아라비아 부족들에 대한 그의 승리도 있다. 그는 그들 중 일부를 사마리아로 추방했다. 그의 연대기에는 이집트 왕 피루(Pir’u)와 아라비아와 팔레스타인 사이의 사막과 북부 아라비아의 여왕 삼시(Samsi) 그리고 사바 비문에서 야티 아머(Yathi’ amar)로 알려진 사바의 왕 이타암라(Ita’amra)가 그에게 바친 공물이 기록되어 있다.[55] 우리는 또한 원통 비문이라고 불리는 다른 아시리아 기록에서 아라비아 부족의 패배에 대한 정보를 발견한다. 우리는 또한 전시된 비문에서 왕들의 조공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 시기의 역사적 사건들이 하나 이상의 기록에서 확인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시마니(Marsimani) 부족은 프톨레미가 단순히 지리(Geography)라는 제목의 작품 여섯 번째 장과 일곱 번째 장에서 언급한 메사마네스(Mesamanes) 부족으로 확인된다.[56] 프톨레미는 이 부족의 위치를 타무드 지역 가까이에 두었다. 타무드는 그 비문에서 언급되었고 아라비아 북서부에 있는 아라비아 부족이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작가들에 의해 언급되었고, 북부 아라비아 비문에 풍부하게 기록되었다. 타무드는 테이마와 메카가 나중에 건설된 지역 사이에 위치해 있다.
티글라드-필레세르 3세 시대에 다른 아라비아 북서부 종족과 함께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동맹에 참여하는 것을 본 에바(Ephah)는 이곳에서 새로운 동맹으로 다시 보인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와 사르곤 2세가 비문에 이미 기록된 것들을 포함하여 기원전 8세기의 사건들을 고려하면, 우리는 아라비아 서부 지역에서 어떤 나라와 부족이 그 장소를 지배했는지 분명한 그림을 가진다. 이 그림에는 군사적 관점과 무역활동 관점이 모두 담겨 있다. 메카는 타무드나 메사마네스와 같은 기원전 8세기 비문에 언급된 부족들의 위치 근처에 있었음에도 이 모든 기록에는 없다. 만약 메카가 그 당시에 존재했다면, 앞서 언급한 부족들과 사바 사이에 위치했을 것이다.
센나케리브(SENNACHERIB)의 지배
메카는 센나케리브가 통치하는 동안 군사, 무역, 종교 현장에 없다.
기원전 705년부터 681년까지 통치한 센나케리브는 그의 아버지 사르곤 2세가 세운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싸웠다. 센나케리브가 한 일들 가운데 바빌로니아에 대한 군사원정이 있었다. 이후 그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여 이집트의 지원을 받는 나라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그 나라들 가운데 둘이 페니키아(Phoenicia)와 블레셋(Philistia)이었다. 다음으로 센나케리브는 예루살렘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 후 그는 기원전 701년경에 이집트를 물리쳤다. 센나케리브가 수행한 또 다른 중요한 원정은 기원전 691년경에 엘람(Elam)을 목표로 했다.
센나케리브는 아시리아에 반기를 든 바빌로니아의 왕 메로다크 발라단(Merodach Baladan)의 편을 들은 아랍인들을 물리쳤다. 또 다른 원정은 북부 아라비아의 여왕인 텔후누(Te’lhunu)에 대한 것이었다. 여왕은 패배했고 두마(Dumah)와 동일시되는 아둠마투(Adummatu)로 쫓겨갔다. 고전 작가들은 뒤마하스(Dumahas)를 언급한다. 도마타(Domatha)는 오아시스 위에 세워진 아라비아 북부의 도시이다. 두마히스(Dumahis)는 알 메디나(al-Medina)와 시리아 사이에 위치해 있다. 뒤마흐트 알-잔달(Dumaht al-Jandal)로도 알려져 있다. 두마는 아라비아 부족들의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였다. 신에게 바치는 신전 와드(Wadd)가 두마에 있었다. 우리는 후대에 아카바만 지역의 한 사원이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인 두마를 대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의 지리학자 아가타르키데스(Agatharchides)가 이 종교적 중심지를 증명한다. 우리는 센나케리브의 군대가 아랍인들이 두마에서 경배하는 형상들을 강탈하여 아시리아로 가져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중에, 에살핫돈(Esarhaddon)은 그것들을 두마에게 돌려주었다.
아시리아의 비문에 따르면, 기원전 689년경에 아시리아인들은 아둠마투(Adummatu)에 대항하여 북부 아라비아에 원정하였다. 그들은 두 명의 북부 아라비아 통치자들의 동맹에 맞서 싸웠다. 아랍의 여왕 텔레후누(Telehunu)와 케다르의 왕 하사엘(Hazael)이다. 이 비문은 동맹군이 패배했고 하사엘은 센나케리브에게 공물을 다시 보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전쟁을 통해 센나케리브는 그의 아버지 사르곤 2세가 점령한 땅에 정착하였다. 센나케리브는 이집트인, 바빌로니아인, 아라비아의 여왕 텔레후누, 두마를 물리침으로써 국경 너머에서 악명을 얻었다. 센나케리브는 향신료 육로를 장악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명성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가 그를 "아랍인과 아시리아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로 퍼져 있었다.[57]
테이마와 같은 아라비아 도시들은 센나케리브에게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쳤다. 니느베(Nineveh)에는 니느베에 있는 문을 “테이마 사람들의 선물이 들어오는 사막의 문”이라고 말하는 비문이 있었다. 이것은 테이마와 같은 교역 도시들이 그들의 교역을 계속하기 원하는 경우 아시리아인들의 손에 얼마나 좌우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도시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시리아인들의 호의를 필요로 했다.
아시리아 연대기에는 카리바일루(Kariba’ilu)라는 이름의 사바 왕이 바친 선물이나 공물이 언급되어 있다. 이 왕은 사바 비문에 잘 알려진 카리빌 워터(Karib’il Water)이다. 아시리아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경계의 육로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케다르의 왕 하사엘은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리브에게 조공을 바쳤다. 텔레후누 여왕과의 동맹이 깨진 후, 하사엘은 센나케리브에게 조공을 다시 바쳤다.
아시리아인이 지배하는 시장과의 무역에 생존을 의존했던 메카는 기원전 8, 7세기에 메카가 존재했다면 아시리아인과의 무역관계에서 기록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라비아 서부의 많은 나라들이 센나케리브에 의해 언급되는데, 특히 향신료 경로를 따라 무역하는 왕국들이 그렇다. 그들 중에는 예멘의 두마, 케다르, 테이마, 사바 등이 있었다. 사르곤 2세는 사바, 테이마, 에바(Ephah)와 같은 향신료 도시도 언급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의존하는 도시들은 아시리아가 그 시장으로 인도하는 경로를 지배할 때 아시리아와 같은 제국의 역사에서 기록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서기 4세기 아라비아의 건조한 지역에 메카가 건설된 이후, 메카는 예멘으로부터 상품을 구입하여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 팔았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8세기 말부터 그 땅을 지배했고 무역 기록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족들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주장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도시가 기원전 8세기와 기원전 7세기 초에 존재했다면 어떻게 기록이 없을 수 있을까?
종교중심지 두마(Dumah)
두마와 같은 당시의 종교 도시가 아라비아 부족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당시 메카는 종교 현장에 없다.
우리가 아시리아 비문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관찰은 북부 아라비아의 부족들을 위한 종교적 중심지인 두마에 관한 것이다. 두마의 우상과 신들은 아랍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그들은 아시리아로 가서 에살핫돈(Esarhaddon)에게 그것들의 반환을 간청하였다. 에살핫돈의 아버지가 그 우상들을 아시리아로 가져간 지 여러 해가 지나서였다. 두마는 아랍인들이 아카바만 지역에 또 다른 신전을 짓기 전에 아시리아 시대에 종교적 우위에 있었다. 사막의 아랍인들이 그들이 존경하는 종교적 중심지에 충실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메카가 아시리아 시대에 존재했다면, 그것은 숨겨질 수 없었을 것이다. 메카는 전투 전에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가고 신들에게 질문하였던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군사적 패배를 당했을 때 메카는 그들의 피난처가 되었을 것이다. 왕들은 두마로 피난하던 것처럼 그곳으로 피난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신들에게 보호를 요청하기 위해 그들의 거룩한 도시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메카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제국의 무역, 군사, 종교 기록에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이슬람 전통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메카가 아브라함에 의해 세워진 유일신교의 중심지이고 아라비아 부족들이 아라비아의 모든 역사에 거쳐 지배할 특권과 특전을 계속 가지고 있던 곳이라는 것과 같은 주장을 확증하는 것은 메카를 모든 아라비아 부족들을 위한 관심과 투쟁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모든 시대에 분명했을 것이고, 각각의 시대들에서 역사적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사실, 만약 무함마드가 메카 이외의 다른 도시를 자신의 종교적 주장으로 선택했다면, 그는 두마와 같은 기원전 7세기 지역의 오래된 이교도 아라비아 종교 중심지와 연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메카는 역사적으로 메카 신전이 세워진 서기 4세기 예멘의 이교도 스타 숭배 이전에는 이러한 고대 연결고리를 뒷받침할 역사가 없다.
에살핫돈(ESARHADDON)의 통치
메카라는 도시의 설립 연대를 알아내기 위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우리는 그의 아버지 센나케리브(Sennacherrib)을 따르던 에살핫돈(Esarhaddon)의 통치에 이르게 된다. 에살핫돈은 기원전 680년부터 669년까지 통치했다. 그의 원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집트, 에티오피아, 아라비아 사막을 침공한 것이다. 오늘날 레바논 베이루트 근처에 있는 칼브(Kalb) 강 근처에서 그의 비문 중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서의 그의 원정을 기록한다. 에살핫돈이 이집트를 침략했을 때, 이집트는 에티오피아인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는 결국 지중해 동쪽 해안을 따라 있는 모든 왕국을 정복하고 그들의 왕들을 니네베(Nineveh)로 데려왔다.
에살핫돈의 비문은 기원전 7세기 초에 아시리아인들이 아라비아의 일부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땅을 지배했는지를 보여주는 아랍인과의 전쟁에 대한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니네베의 연대기는 그러한 많은 사건들을 보여준다. 한 가지 사건은 두마에게 아라비아 신들의 신상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두마는 기원전 9세기 이래로 아라비아 부족들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에살핫돈은 타부아(Tabua)를 구했다. 그녀는 자기 백성에게서 어린 소녀로 잡혀서, 아시리아 왕들의 뜰에서 자랐다. 아시리아 사람들은 그녀를 두마에서 아랍인의 여왕으로 임명하였다. 아시리아 왕들이 아라비아의 일부 땅에 통치자를 임명한 것은, 에살핫돈 당시에, 그들이 아라비아 일부 지역에 끼친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니네베 연대기는 케다르 왕 하사엘(Hazael)이 아시리아에게 바친 공물을 보고한다. 아시리아의 기록에는 하사엘이 에살핫돈에게 복종하려고 니느웨에 왔을 때에 관한 기록이 있다:
나의 위엄이 그를 압도하였고, 아라비아 왕 하사엘은 금과 은과 보석을 가지고 내 앞에 와서,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59]
니네베 연대기에는 하사엘의 아들 이아-히-우(Ia’-hi-u’)도 있는데, 그는 야우타(Yauta’)라고도 불린다. 그는 하사엘이 죽은 후 케다르의 왕이 되었다. 아시리아 군대는 우-아-부(U-a-bu)가 일으킨 반란을 이아-히-우가 물리치도록 돕기 위해 개입했다. 우-아-부는 야우타에 대항하여 아라비아 동맹을 이끌었으나 아시리아군에게 패배하였다. 나중에 이아-히-우는 아시리아인들에게 충성하지 않았고 그 결과 아시리아인들은 이아-히-우를 공격하였고 그는 패배하고 도망쳤다. 그는 나중에 돌아와서 아시리아의 다음 왕인 아슈르바니팔(Assurbanipal)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것들과 에살핫돈의 비문에서 나온 다른 예들은 북부 아라비아, 특히 케다르가 아시리아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시리아 사람들은 왕들을 세우고, 조공을 받고, 그들에게 직접 대항하는 반란이나, 그들에게 충성하는 아라비아 통치자들에게 대항하는 모든 반란들을 진압하였다. 앞서 언급한 사건들은 다른 아시리아 비문 기록에서도 발견된다.[60] 또한 니네베와 앗수르(Assur)에도 같은 사건들을 기록한 다른 비문들이 있다. 이 예들은 에살핫돈 통치 기간 동안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이 고고학적 기록에서 어떻게 잘 입증되었는지를 증명한다. 우리는 니네베의 소위 "Fragment F"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에살핫돈의 군대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시나이 광야를 건넜을 때, 그들은 물을 공급받기 위하여 아라비아 낙타를 사용했다. 이것은 아라비아의 많은 땅들에 걸친 에살핫돈의 지배를 통하여, 아랍인들의 사막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고 그들의 낙타로 아시리아 군대가 먼 땅을 공격하기 위해 넓은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실, 에살핫돈의 비문에 기록된 사건들 가운데는 바주(Bazu) 땅으로의 그의 원정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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