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슬람지하드워치
이슬람의 근대화와 개혁

케말 아타튀르크(Kemal AtaTurk)와 이슬람

작성자 워치독 작성일16-12-12 19:41 조회4,602회 댓글0건

본문

 

Q: 나의 연구에 따르면, 무함마드 이슬람의 역사에서 가장 적게 인정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개혁가들 가운에 한 명이 터키공화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amal AtaTurk)였다. 설명해주겠는가?

 

A: 이 질문은 오늘날 터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아주 관련이 있다. 나는 진실로 그의 이야기를 우리 독자들과 나누기를 원하는데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뜻이 있는 곳에 거의 항상 길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1881년에 오토만제국 Selanik에서 무슬림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오토만 칼리프 치하에서 성장하였다. 능력이 있는 군장교로서 그는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혁명정치가로서 터키공화국의 창시자이며 초대대통령이 되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갈리폴리(Gallipoli) 전투에서 사단장으로 복무하면서 지략이 있으며 굉장히 유능한 장교로서 자신을 입증하였다. 그의 기병대의 승리로 그의 군대의 존경과 이전에 그의 적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연합군들에 의한 오토만 제국의 패배에 이어서, 무스타파 케말은 그의 나라가 분할되는 것을 거부하여서 터키독립전쟁으로 알려진 터키국민운동을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앙카라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협상국들이 보낸 군대에 승리하였다. 그의 성공적인 군사작전은 터키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졌다.

 

터키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아타튀르크는 정치, 경제, 종교, 문화 개혁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계몽운동 주창자인 아타튀르크는 오토만제국의 폐허를 근대적, 민주적, 세속적 국민의 국가로 바꾸려고 하였다. 아타튀르크 개혁의 원칙들은 많은 경우에 케말리즘(Kemalism)으로 호칭되며 근대 터키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계속하여 형성하였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무스타파 케말은 42세였다. 그는 유능한 군장교로서 그의 명성을 이용하였고, 그의 개혁을 제도화하고 터키 사회를 빈사 상태의 방대한 무슬림 시민 제국에서 근대적, 민주적, 세속적 국가의 시민들로 바꾸면서 1938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세월을 보냈다. 그는 오토만 제국이 완전히 멸망한 이유를 이해하였던 이슬람이 지배한 무슬림 국가의 얼마 안 되는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무슬림들을 7세기의 수렁에 빠뜨려서 족쇄들에 묶여있는 동안 발전을 방해하는 이슬람의 무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1,400년 동안 처음으로 모스크와 국가를 분리시키면서 그의 국민들의 족쇄를 풀 수 있었던 무함마드 이슬람 역사에서 유일한 지도자였다.

 

여성에 대하여 굴종과 복종을 강제한다고 느꼈던 히잡 착용을 그는 금지하였다. 그는 무슬림 여성들에게 이제까지 보다 더 많은 교육, 자유, 평등을 주면서 20세기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는 남성들이 Fez(페즈; 터키모자)를 착용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고 남성들이 서양 옷을 입게 만들었다.

 

그는 터키인들이 아랍문자에서 라틴문자를 사용하도록 바꾸었다.

 

그는 교육체계를 꾸란과 하디스에 집중된 것에서 모든 근대과학을 포함하며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환영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는 물라들과 그 밖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한 보복의 두려움이 없이, 남성과 여성이 서로 그리고 소위 불신자들과 사귀고 춤을 출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물라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정부의 일에 선동 또는 간섭하는 능력이 없도록 모스크에서 설교를 간략하게 하도록 제한함으로 그들의 입을 막았다.

 

어째든 그는 터키인들의 최악의 적이며 무지하며 퇴보하도록 그들을 붙잡는 것이 아라비아에서 수입된 무함마드의 사이비종교였다는 것을 알았던 최초의 그리고 우수한 터키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압제자이며 독재자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알라의 최악의 적들” 가운데 한 명으로 그가 우뚝 서게 만드는 것은 무함마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학자들에 대한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증오 때문이었다.

 

재미있게도, 케말의 경력 초기동안, 많은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이슬람을 옹호하는 사람이며 그들이 기독교인들과 싸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지(Ghazi), 기독교인들 도살자”가 그들이 그에게 준 이름이었다. 그들이 그의 진정한 의도를 알았다면, 그들은 그를 “가지, 이슬람 도살자”라고 불렀을 것이다.

 

1933년 1월에, 터키 사람들은 꾸란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었다고 전해지는 신비한 달인 라마단의 시작을 알리는 신월(new moon)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933년에 터키 사람들은 그들의 엄격한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 파샤에 의하여 이번 라마단부터 그들이 더 이상 그들의 신을 아랍어 알라로 부르지 말아야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인 케말은 -알라가 하나님 이라면-터키 사람들이 알라를 그의 터키식 이름인 탄리(Tanri)로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수세기의 전통을 제외하면 물론 이유가 없었으며, 터키 이맘들(imams; 사제들)이 모두 아랍어로 암기하여 꾸란을 알며, 한편으로 소수가 터키어로 꾸란을 암기하였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유가 없었다.

 

잔인할 정도로 엄격하게, 케말은 무에진(muezzin; 모스크 첨탑 끝에서 신도들에게 기도시간을 알리는 사람)들에게 공허한 용어 알라후 악바르!(Allahu Akbar; 아랍어로 “알라는 위대하다!”)가 아니라 친숙하지 않은 용어 탄리 우루두르!(Tanri Uludur!)라고 외치라고 명령하였는데 이것은 터키어로 동일한 의미이다.

 

이맘들이 모스크에서 예배를 중지하고 기도방석을 감추겠다고 협박하였을 때, 정부는 예비로 400개의 새로운 기도방석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하였고 “꾸란을 터키어로 아는 무에진들을 새로이 훈련시켜서 현장에 내려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협박하였다.

 

라마단이 점점 더 가까워오자, 문화부(이 부서는 종교도 관할한다) 공무원들이 그들의 용기를 모아서 케말이 터키의 신 이름을-적어도 그 해에는-바꿀 수 없다고 그에게 말하였다. 알라후 악바르!를 계속하여 외친 혐의로 이미 무에진들 몇 명이 감방에 들어갔다. 철저하게 세뇌된 민중들이 점점 더 추해지고 알라를 외치는 자들에게 동조하였다.

 

1,300년 묵은 신을 개명하는 것을 배려하여, 케말은 무에진들에게 꾸란을 터키어로 배우는 시간을 주었고, 결국은 “잠정적으로 그들이 좋아하는 데로 예배하게 허용하라”고 말하는 정도까지 되었다.

 

신월이 나타나기 단지 몇 시간 전에 그 기쁜 소식을 선포하려고, 그의 문화부 장관이 빛과 같이 달려 나갔다. 공무원들이 “현재 라마단 월 동안 예배는 허용되며 꾸란은 아랍어로 낭송되지만 이맘들의 설교는 터키어로 해야 한다”고 부드럽게 발표하였다. 낮 시간에 그들이 아무것도 먹지 않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라마단 달 동안 특히 예민하다고 그들은 변명하였다. 금식이 끝나면, 터키 사람들이 보다 정상적으로 되며 그들의 신에 대한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일 년 후에 경건한 “녹색 도시” 브루사(Brusa)에서 무에진이 첨탑들 가운데 하나에서 탄리 우루두르(Tanri Uludur)를 외쳤는데 그곳 브루사는 14세기 이후로 알라후 악바르를 들었던 곳이었다. 케말 파샤의 신에 분노하여서, 폭도들이 그 무에진과 그를 구하러 온 경찰을 공격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이름을 방어하기 위하여 재빨리, 그리고 신생 터키에 오래 묵은 터키의 운명을 더 빨리 보여주기 위하여, “승리하는 자” 케말 가지(Ghazi)는 브루사를 공격하여 60명이 신도들을 체포하고, 오그럽자미(Ouglubjami) 모스크의 무프티(mufti; 종교판사)를 쫓아내었고, 이후로부터 하나님을 탄리로 부르라고 명령하였다.

 

모든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단순하며 쉽게 분노하였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그는 비꼬며, 냉혹하며, 무뚝뚝하였다. 그는 작은 비판에 흥분하였고 그에게 변명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칼같이 잘랐다.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고 협조하지도 않았다. 마음 약한 내각의 관료가 터키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춤추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제안하였을 때, 그는 꾸란을 그에게 던지고 막대기로 그를 그의 사무실에서 쫓아내었다. 그리고 케말 아타튀르크는 다음의 잊혀지지 않는(그리고 근본주의 신자들의 편에서 용서할 수 없는)말들을 하였다:

 

“500년 동안 아랍 세이크[무함마드]의 이러한 규정들과 이론들과 게으르고 아무 쓸모없는 물라들의 수세대에 걸친 해석들은 터키의 민법과 형법을 결정하였다.

 

헌법의 형태, 각 터키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그의 음식, 그가 일어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 그의 옷 모양새, 자녀들을 생산하는 산파의 역할, 학교에서 그가 배우는 것, 그의 관습, 그의 생각, 그의 가장 은밀한 습관까지도 그들이 결정하였다.

 

이 부도덕한 아랍의 신학, 이슬람은 죽은 것이다. 그것은 사막의 유목민 부족들에게 적합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근대의 발전하는 국가에 전혀 좋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물라들! 그가 얼마나 그들을 증오하였는가. 그가 아는 한, 그들은 사람들의 음식을 먹어치우는 게으른 기생충들이었다. 사람들과 같이 일하기 위하여 그는 그들을 모스크와 마드라사에서 쫓아내었다. 어린 나무에서 넝쿨을 걷어내는 것처럼 그는 터키에서 종교를 분리하였다.

 

케말은 알라에 관하여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았고 오직 터키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는 알라를 경멸하였고 터키의 불행에 대하여 알라를 비난하였다. 터키 사람들의 손을 마비시킨 것은 알라의 전제적인 규정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무지한 터키 농민들에게 알라는 현실이었지만 민족주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그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알라를 그의 목적에 이용하기로 결심하였다.

 

“알라의 도움으로” 그의 국민들은 무슬림이기 보다는 터키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알라가 케말의 목적에 봉사한 후, 케말은 알라를 버릴 수 있었다.

 

여기서 역설은 무함마드가 1,400년 전에 하였던 아주 똑같은 방법으로 케말이 알라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케말에게 있어서, 무함마드의 이슬람과 문명은 용어에서 정반대였다. 냉소적인 순간의 영감으로 한 번 그가 터키 국민들에게 말하였듯이 “원한다면, 우리는 국민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 수 있다!”

 

그의 국가는 무슬림 신자들이 바라는 개혁된 이슬람 국가로 되는 것이 아니었고, 군대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케말 자신의 지성적인 관료주의 체계로 운영되는 것으로 술탄의 국가만큼이나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가진 완전한 세속주의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한번은 아나톨리아에서 병사들을 검열하면서, 케말이 질문하였다,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그분이 어디에 살지?”

 

그 병사는 케말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무스타파 케말 파샤입니다. 그분은 앙카라에 삽니다.”

 

“그리고 앙카라가 어디지?” 케말이 질문하였다.

 

“앙카라는 이스탄불에 있습니다,”가 그 대답이었다.

 

대열속으로 더 들어가서 그가 또 다른 병사에게 질문하였다, “무스타파 케말이 누구지?”

 

그 대답은 “우리의 술탄”이었다.

 

-이르판 오르가(Irfan Orga): 상승하는 불사조

 

창취자 여러분, 무함마드 이슬람에서 무지에 대한 한 가지 결과는 그들의 사회에서 모든 일이 좋지 않을 때마다, 무슬림들은 그것이 꾸란에 충실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알라가 그들을 처벌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그로인하여, 그들은 꾸란에 더 많이 충실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서 이제까지 보다 더 많은 무지, 불신자들에 대한 증오, 편집광, 분노를 낳는 사악하며 소용돌이치는 나락으로 추락한다.

 

그들은 현실을 모르며 알 수도 없다. 그들의 정신세계는 모든 근본주의자들의 정신세계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폐쇄되어 있고 합리적인 발전을 할 수 없다. 그러한 폐쇄된 마음은 가난한 경제와 사회조건들이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이어서 사람만이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이전에 미국 하원의 대변인 뉴트 깅그리치(Newt Gingrich)가 근본주의 무함마드 무슬림의 정신세계를 다음과 같이 완벽하게 설명하였다.

 

“종교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들은 좋은 학문적 시설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정부부처와 함께 생각하지 않으며 그들은 인정된 어떠한 합리적인 방법도 생각하지 않는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완벽하게 옳았다.

 

자료출처 http://www.the-koran.blogspot.kr/2008/08/kamal-ata-turk-islam-1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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