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구한 쁘와띠에(Poitier)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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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의 청취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기독교 군대와 이슬람 군대 사이의 쁘와띠에(Poitier) 전투-뚜르(Tours) 전투로도 불리운다-에 관하여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현재의 유럽과 기독교 세계에 대한 무함마드 추종자들의 진정한 의도에 관하여 토론하는 것은 아주 타당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우리는 믿는다.
설명해주겠는가?
A: 이 전투 배경의 이력을 먼저 설명하고 이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
뚜르 전투(732년 10월 10일)는 쁘와띠에 전투로도 알려져 있다. 이 전투는 프랑크 지역과 독립한 아키텐 사이의 경계에 가까이 있는 프랑스의 뚜르 시 인근에서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나중에 마르텔(Martel)이라고 호칭된 샤를 피핀(Charles Pepin)이 지휘하는 프랑크와 부르군트 군대가 알-안달루스(스페인)의 총독인 압둘 라흐만 알 가피끼(Abdul Rahman Al Ghafiqi)가 지휘하는 아라비아 우마이드 왕조 칼리프의 군대가 싸웠다.
아라비아 우마이드 왕조 칼리프는 뚜르 전투 당시에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다. 그 칼리프는 우마이드 왕조가 통치할 때 엄청나게 팽창하였다. 무슬림 군대는 600년대 후반에 북아프리카와 페르시아를 휩쓸었다.
타리끄 이븐-지야드(Tariq ibn-Ziyad)가 지휘하는 군대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스페인 반도에 무슬림 국가를 수립하였고 곧 이어 이 국가는 그들이 승리하는 한 유럽으로 깊숙이 팽창할 의도로 프랑스 남부로 침입하였다. 우마이드 왕조 아랍인들의 무함마드 무슬림 제국은 이제 방대한 영토를 가졌고 3개 대륙에서 수천만 명의 다양한 기독교인들, 조로아스터교인들, 유대인들, 힌두교인들과 그 밖의 사람들을 지배하였고, 식민지로 하였고, 정복하였다.
우마이드 왕조는 이전에 있었던 두 개의 초강대국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하나는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으로서 완전히 흡수되었고 또 하나는 비잔틴 기독교 제국인데 아르메니아, 시리아, 유대/팔레스타인,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포함하여 제국의 대부분이 흡수되었다.
샤를 피핀이 통치하는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다.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 대부분의 프랑스와 서부독일과 그 아래 국가들의 대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로마가 멸망한 이후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제국주의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영토에서 프랑스 남부 지역으로 침입하면서 압둘 라흐만은 많은 도시들과 마을들을 파괴하였고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노예로 만들었으며 그가 가져갈 수 있는 모든 전리품과 재산을 강탈하였다.
그의 군대가 보르도 시를 점령하였을 때 그의 군대가 귀중한 것들을 너무 많이 약탈하여서 모든 병사들이 “금화병과 잔들과 에메랄드와 그 밖의 귀금속들을 실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압둘 라흐만은 그의 기병대의 전략적 우수성을 믿었고 기병대로 프랑크 왕국을 계속하여 공격하였다. 이전의 전투들에서 그들에게 아주 많은 승리를 가져다주었던 긴 창과 칼로 무장한 그들의 기병대에 우마이드 왕조가 가졌던 믿음은 그러나 이번에는 틀렸다.
중세의 보병 부대가 기병대 공격에 대항하였던 희귀한 사례들 가운데 하나로서 일부 아랍 자료들에 따르면 아랍 기병대가 프랑크 영토의 종심으로 몇 차례 밀고 들어갔음에도 훈련된 프랑크 병사들은 그 공격에 맞섰다.
“무슬림 기병들은 프랑크 부대들에 대항하여 두려움 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밀고 들어왔지만 프랑크 병사들은 영웅적으로 저항하여서 양측에 사상자가 많았다.” 이 결정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군대의 방어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샤를이 그의 병사들에게 가르친 수년간의 훈련이 제 몫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사실상 혹독하게 훈련된 그의 군대는 그 당시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을 성취하였는데 보병부대가 기병부대의 거센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크 보병부대가 우마이드의 중무장한 기병대의 계속된 공격을 저지하면서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샤를은 훈련과 동기부여가 잘되어 있는 전문적인 보병부대를 만들었고 “그와 함께 유럽 전체에서 작전을 하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샤를이 그의 적전선을 기습하고 교란시키고 그의 보병들 위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징세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모사라베(무어인의 스페인 정복 후에 무어 왕에게 복종할 것을 조건으로 신앙이 허용된 기독교도) 연대기 754 페이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전투의 타격에서 북쪽 사람들은 요동하지 않는 바다와 같았다. 그들은 서로 결집하여 마치 얼음으로 된 보루와 같이 굳건히 섰고 그들의 칼을 크게 휘둘러 아랍인들을 쪼개었다. 그들의 지휘관을 가운데 두고 무리를 형성한 프랑크 사람들은 그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였다.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손은 적의 가슴에 그들의 칼을 내리쳤다.”
영내로 침입한 그 우마이드 군대는 샤를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를 둘러 싼 경호하는 병사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프랑크 역사가들이 주장하듯이 그 전투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을 때 프랑크 특공대가 무슬림들이 보르도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위태롭게 한다는 소문이 우마이드 군대에 퍼졌다.
우마이드 기병들 가운데 일부가 그들의 지휘관들의 허락도 없이 즉시 전투에서 벗어나 그들의 전리품을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 전투에 관한 무슬림 기록에 따르면 전투도중에 샤를이 보낸 프랑크 군대의 특공대가 진영과 (노예들과 그 밖의 약탈품을 포함하여)보급부대를 기습하기 시작하였다.
우마이드 후방 진영에 침입하여 혼란을 야기하고 가능한 많은 노예들을 풀어주어 적들의 일부분이 철수하기를 바라며 샤를은 특공대를 보냈을 것이다. 이 전략은 우마이드의 많은 기병대가 일방적으로 대열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진영으로 돌아가면서 그가 대충 예상하였던 것을 넘어서 성공하였다. 나머지 무슬림 군대에게 이것은 퇴각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곧 그것은 훈련되지 못한 군대의 전통이 되었다.
서방세계와 이슬람 기록 모두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와해를 저지하려고 하는 도중에 압둘 라흐만이 포위되어서 목이 떨어졌고 아라비아 군대는 모두 그들의 진영으로 퇴각하였다는 것이다. 아랍의 한 역사적 자료는 “모든 군대가 적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많은 병사들이 퇴각하는 도중에 죽었다.”라고 솔직히 말한다.
프랑크 군대는 대형을 다시 갖추고 전투가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믿으며 밤 동안 휴식을 취하였다.
아랍 군대가 다음날 전투를 다시 시작하지 않자 프랑크 군대는 매복을 두려워하였다. 샤를은 처음에 이슬람 군대가 그를 언덕 아래로 유인하여 들어오게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 전략을 알았고 모든 방법으로 저지해야 했다. 그는 실제로 수년 동안 그의 군대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형을 무너뜨려 흩어지지 말라고 훈련시켰다.
나중에 프랑크 병사들이 우마이드 진영을 집중적으로 정찰한 후에서야 이슬람 군대가 밤중에 은밀히 도망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측 모두의 역사적 기록이 말하는 것은 이슬람 군대가 너무 급히 그들의 진영을 떠나서 우마이드 군대가 그들이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으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이베리아/스페인으로 돌아가면서 텐트까지도 버렸다는 것이다.
프랑크 군대는 승리하였고 압둘 라흐만 알 가피끼는 살해되었고 샤를은 그 후에 남부지방에서 그의 영향력이 커졌다.
그 전투의 결과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가 승리한 것으로 해석한 9세기 역사가들은 샤를에게 마르텔러스(Martellus; 망치)라는 별명을 주었는데 그리스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항한 유대 마카비 반란의 유다 마카비우스(Judas Maccabeus; 망치)에게 주어졌던 이름을 연상시킨다.
그 정확한 지역과 병사들의 숫자를 포함한 전투의 정확하고 구체적인 것은 존재하는 기록에서 알 수 없다. 단지 확실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프랑크 군대가 기병대 없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는 것이다.
역사는 특별한 전투들로 가득하며 그것의 결과는 인간 역사의 여정을 실제로 바꾸었고 그러한 전투들은 마라톤 전투와 아르벨라[고대 페르시아의 도시, 현재의 Erbil; 근처에서 Alexander 대왕이 페르시아의 Darius 3세를 격파함(331 B.C.)] 전투와 같은 전투들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샤를 마르텔이 뚜르에서 이긴 전투는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는데 왜냐하면 그 전투는 기독교 유럽 전체가 이슬람화되는 것에서 구하였고 그로인하여 사실상 기독교를 보전하였다.
역사의 이 순간에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무함마드의 이슬람은 전쟁 없이 기독교 유럽을 재정복하는 과정에 있다. 그들은 느리지만 아주 확실하게 유럽 내부에서 인구증가로 유럽을 정복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민과 현저하게 높은 출생률을 통해서이다.
자료출처 http://www.the-koran.blogspot.kr/2008/07/poitier-saviour-battle-part-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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