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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서 깨우침으로 (B)

작성자 워치독 작성일16-12-15 17:00 조회3,024회 댓글0건

본문

부인

 

충격을 받은 후 또는 아마도 동시에 사람들은 부인한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부인에 빠져있다. 그들은 꾸란이 기만이라는 것을 수용할 수 없고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하며 꾸란에서 기적을 찾으려 하며 꾸란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논리의 법칙을 기꺼이 왜곡하면서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들은 꾸란의 충격적인 구절이나 무함마드에 의하여 행하여진 비난받을 만한 행동이 드러날 때마다 부인한다. 이것은 내 여정의 처음 단계에서 내가 했던 것이다. 부인은 안전한 장소이다. 이것은 당신이 무지의 낙원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다음 단계로 나가기를 주저하며 돌아가려고 한다. 부인에서 당신은 안전지대를 찾는다. 부인에서 당신은 상처받지 않으며 모든 것이 OK이고 모든 것이 괜찮다.

특히 사람들이 자기 모든 생애에 거짓에 익숙하다면 진실은 극도로 고통스럽다. 무슬림이 무함마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어린아이에게 자기 아버지가 살인자이고 강간범이고 도둑놈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기 아버지에게 알랑거리는 아이는 세상의 모든 증거를 그에게 보여준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 충격이 너무 커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는 당신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고 자기에게 상처를 준 당신을 증오하며 당신을 저주하고 당신을 자기 적으로 여기며 분노로 폭발하여 당신을 물리적으로 공격까지도 할 것이다.

이것이 부인의 단계이다. 이것은 자기방어 체계이다. 고통이 너무 크다면 부인은 그 고통을 제거해 줄 것이다. 한 어머니가 자기 아이가 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녀의 첫 반응은 때로는 부인이다. 거대한 재난의 순간에 우리는 보통 이것이 모두 악몽이고 결국 잠에서 깨어날 것이고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는 지친 감각에 휩싸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실은 단호하고 양보하지 않는다. 우리는 잠시 동안 부인하며 살 수 있지만 조만간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슬림들은 거짓 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이슬람을 거역하여 말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므로 아무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 그들은 신속히 잠잠해진다. 그러면 당신이 듣는 모든 것이 거짓들인데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는가? 일방으로 꾸란이 기적임을 주장하며 누구든지 다음과 같이 꾸란 구절을 만들어 내라고 도전한다.

“만약 너희가 하나님의 종에게 계시한 것에 관하여 의심한다면 그와 같은 말씀의 한 구절이라도 가져오라 너희들이 사실이라고 고집한다면 하나님 외에 증인들을 대어보라.”(꾸란 2:23)

그런데 꾸란은 추종자들에게 감히 꾸란을 비난하거나 도전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이라고 가르친다. 당신이 감히 도전하여 꾸란에 기록된 것과 같은 구절을 만들어 낸다면 당신은 이슬람을 모욕한 것으로 고소되고 그 처벌은 죽음이다.

진실을 직시하게 되고 우리가 믿은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아픔은 극도로 고통스럽다. 그것을 다루는 유일한 수단과 자연스러운 방법은 부인이다. 부인은 그 고통을 가져간다. 그것이 자신의 머리를 모래에 감추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위로가 되는 기쁨이다.

사람은 영원히 부인하며 살 수 없다. 곧 밤이 올 것이고 냉혹한 현실은 그의 뼈를 시리게 하며 그가 무지의 낙원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문은 닫혀 있고 그 열쇠는 버려졌다. 당신은 너무 많이 안다. 당신은 버려졌다. 두려움에 싸여 당신은 불확실성의 여명 속에 있는 어둡고 보이지 않는 길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하여 조심스럽게 당신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당신은 마지못하여 목적지를 향하여 더듬거리며 나아간다. 그러나 두려움이 당신을 엄습하며 당신이 그 낙원으로 돌아가려 할 때마다 당신은 다시 그 문이 닫혔음을 보게 된다.

대단히 많은 무슬림들이 부인하며 산다. 그들은 닫쳐진 문 뒤에 있다. 그들은 뒤로 돌아갈 수 도 없고 과감히 거기서 떠날 수 도 없다. 그 동산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기를 절대 못 떠날 사람들이다. 이 문은 오직 당신이 나가게만 할 것이다. 당신은 들어 갈 수 없다. 그 동산은 확신의 동산이다. 그것은 믿음이 있는 자를 위하여 의심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사고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믿는다. 그들은 밤이 낮이고 낮이 밤이라 해도 믿을 것이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칠 층 천에 올라갔고 알라를 만났고 달을 쪼갰고 천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믿을 것이다.

볼테르가 말하였듯이 불합리한 것을 믿는 자들은 끔찍한 일들을 저지른다. 그들은 또한 불신자들을 죽이는 것이 선이고 폭탄테러가 성스러우며 돌로 쳐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아내들을 때리는 것이 하나님이 명령한 것이고 불신자를 증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을 것이다. 무지의 낙원에서 거주하는 대부분은 이러한 자들이다. 의심하는 자들은 여전히 소수이다.

이러한 자들이 거짓 안에 영원히 계속하여 둥지를 틀고 있다면 이들은 진리를 절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들은 모든 것은 이슬람은 선하고 무슬림들이 진정한 이슬람을 실천한다면 세상은 낙원이 되며 이슬람의 문제들은 모두 무슬림들의 잘못이라는 거짓이다. 이것이 거짓이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쁘지도 않고 더 선하지도 않다. 그들이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도록 만드는 것은 이슬람이다. 더 이슬람주의자가 될수록 더 피에 굶주리고 더 증오하는 자가 되며 더 좀비가 된다.

나는 내가 읽은 것을 부인하기를 원하였다. 나는 꾸란의 진정한 의미가 뭔가 다른 것이기를 믿기 원하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이러한 비인도적인 구절들을 그 문맥에서 제거하자고 말하며 나 자신을 더 이상 바보로 만들 수 없었다. 꾸란은 문맥이 없다. 구절들이 자주 논리의 일관성이 없이 불규칙하게 채워져 있다.

 

혼란

 

나의 글을 읽고 내가 꾸란과 이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 상처 입은 사람들은 운이 좋은 것이다. 그들은 나를 비난하면 된다. 그들은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내게 모든 화풀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꾸란을 읽고 그것의 내용을 알았을 때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충격과 부인의 단계를 지난 후 나는 혼란스러웠고 나 자신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내가 여기던 것을 사고하고 의심하고 잘못된 점을 찾아낸 것 때문에 나 자신을 증오하였다.

다른 모든 무슬림들과 같이 나는 그 많은 모든 거짓들과 불합리성들과 비인도적인 것들에 노출되었었고 받아들였다. 나는 신앙인으로 자랐다. 나는 내가 들은 모든 것을 믿었다. 이러한 거짓들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점차적으로 조금씩 내게 주어졌다. 나는 비교할 만한 다른 선택이 절대로 없었다. 그것은 예방접종과 같다. 나는 진리에 면역되어 있었다. 그러나 꾸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읽기 시작하였을 때 이 책이 진실로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그 거짓들이 돌연히 내 앞에 다 드러났다.

나는 그것 모두를 들었고 받아들였다. 나의 합리적인 사고는 마비되었다. 나는 꾸란의 불합리성들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되었다. 내가 이치에 안 맞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 나는 그것을 지워버리고 자신에게 “큰 그림”을 보아야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좋은 큰 그림은 내 마음속을 제외하고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완벽한 이슬람을 마음속에 그렸다. 그래서 그러한 모든 불합리성들은 그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내가 꾸란을 통독하였을 때 내 마음속에 있는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그림을 발견하였다. 꾸란의 페이지들로부터 드러난 새로운 이슬람의 그림은 평화와 평등과 관용의 종교로서 이슬람과는 거리가 먼 폭력적이고 관용이 없으며 비합리적이며 오만한 것이었다.

이 많은 불합리성에 직면하여 제 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나는 그것을 부인해야 하였다. 그러나 진실이 내 앞에 태양과 같이 나와 있는데 얼마나 오래 동안 내가 그 진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 나는 꾸란을 아랍어로 읽고 있었기에 잘못된 번역을 탓할 수 없었다. 나중에 나는 다른 번역본을 읽었다. 나는 많은 영어 번역본들이 완벽히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번역자들은 단어들을 왜곡하고 때로는 둥근 괄호 또는 각 괄호 안에 거친 느낌을 완화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말들을 더함으로 꾸란에서 비인도성과 폭력성을 감추려고 매우 열심히 노력하였다. 아랍어 꾸란은 그것의 영어 번역본보다 더 충격적이다.

혼란스러웠고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몰랐다. 나의 믿음은 흔들렸고 나의 세계는 무너졌다. 내가 읽은 것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 거대한 거짓이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계속하여 자신에게 질문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보지 못하고 나는 볼 수 있을까? 어떻게 Jalaleddin Rumi같은 위대한 선각자는 무함마드가 사기꾼이고 꾸란이 사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고 나는 알 수 있는가? 이때에 나는 죄책감의 단계에 들어갔다.

 

죄책감

 

죄책감은 여러 달 동안 지속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나를 증오하였다.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부끄러웠다. 지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신뢰하는 배운 사람들과 대화 하였다. 내 안에 타는 불을 꺼줄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 이 배운 사람들 가운데 한 분이 당분간 꾸란을 읽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는 기도하고 나의 믿음을 강화하는 책들만 읽으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렇게 하였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꾸란의 불합리하고 때로는 무자비하고 우스꽝스러운 구절들에 대한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내 책꽃이를 보고 그 책을 볼 때마다 고통을 느꼈다. 꾸란을 꺼내서 다른 책들의 뒤에 감추었다. 내가 꾸란에 대하여 잠시 동안 생각하지 않으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떠나가고 내 믿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떠나지 않았다.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부인하였다. 나는 충격을 받았고 혼란스러웠고 죄책감을 느꼈고 그것은 고통스러웠다.

죄책감의 기간은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 어느 날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고 결정하였다. 내 자신에게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내게 무의미한 것들에 관하여 영원히 생각하며 이 죄책감을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두뇌를 주셨다면 그것은 그분이 내가 두뇌를 사용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옳고 그르다고 인지한 것이 편향되었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분이 내게 살인은 나쁘다고 말씀하시고 내가 살해당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왜 그의 사도는 그렇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믿지 않는 자들을 살해하라고 명령하는가? 강간이 나쁘다면 강간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데 왜 알라의 선지자는 전쟁에서 잡힌 여자들을 강간하였는가? 노예제도가 나쁘다면 나의 자유를 잃고 노예가 되는 것이 싫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데 왜 하나님의 선지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그들을 팔아서 부자가 되었는가? 종교를 강제하는 것이 나쁘다면 남이 내가 원하지 않는 종교를 내게 강제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 데 왜 무함마드는 지하드를 장려하고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불신자들을 살해하고 약탈하고 그들의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전리품으로 분배하였는가? 하나님이 내게 어떤 것이 선한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내게 선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것이 선함을 아는데 왜 그의 선지자는 그것의 반대로 행동하였는가?

 

각성

 

이 죄책감이 나의 어께에서 떠났을 때 황당함과 환멸과 냉소가 따른다. 내 인생의 여러 해를 낭비한 것이 이 어리석은 믿음에 여전히 빠져있는 모든 무슬림이 이 거짓교리의 이름으로 생명을 잃은 모든 사람들이 모든 종류의 학대와 억압으로 고통 받는 실제적으로 모든 이슬람 국가들의 모든 여성들이 안타깝다. 그들은 자신들이 학대받는 것도 모른다.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난 모든 전쟁들을 생각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었다. 수 백 만의 믿는 자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믿음을 전파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집과 가족들을 떠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수 백 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집단학살하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 문명들이 파괴되었고 도서관들이 불탔고 너무 많은 지식들이 소실되었다. 나의 아버지가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나 겨울의 찬물 속에서 voodoo를 하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아버지가 금식하는 달에 배고프고 목이 말라서 집에 돌아오는 것을 기억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는 수십억의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내가 믿은 모든 것이 거짓들이었고 내가 행한 모든 것이 인생의 낭비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10억 명의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물로 보이는 신기루를 쫓아서 이 무지의 간조한 사막에서 여전히 실종되어 있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다.

그전에는 하나님이 항상 나의 마음 뒤에 있었다. 나는 상상 속에서 그에게 이야기하곤 하였고 그 대화의 상대는 나였던 것 같다. 나는 하나님이 지켜보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세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의 걸음을 인도하고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은 매우 위로가 된다. 알라와 같은 것은 없고 하나님이 있어도 그분이 알라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웠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때까지 이 우주에 창조주가 계신다면 그분은 무함마드가 상상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알라는 철저하게 무지하다. 꾸란은 잘못된 것들로 가득하다. 이 우주의 창조주가 꾸란의 하나님과 같이 멍청할 수 없다. 알라는 그 환자 무함마드의 마음속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알라가 무함마드의 상상의 산물이었으며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허구의 존재에게 기도한 모든 이 세월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내가 실망했겠는가!

 

우울증

 

실망과 상실감은 슬픔 또는 약간의 우울증의 느낌이 동반되었다. 마치 나의 모든 세계가 분해되는 것 같았다. 내가 서있는 땅이 더 이상 거기에 없고 바닥이 없는 함정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과장하지 않고 내가 지옥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당황하였고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도 도울 수 없었다. 내 생각에 대하여 부끄러웠고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증오하였다. 죄책감은 깊은 상실감과 우울증을 동반하였다. 대체로 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이다. 나는 모든 것의 좋은 면을 본다. 항상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쉽게 우울해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이 상실감은 압도적이었다. 나는 아직도 내 마음의 중압감을 기억한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고 나는 이유를 몰랐다. “이것이 하나님의 벌인가?” 계속해서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를 아프게 한 적이 없다. 인생에서 나와 만나서 도움을 청했던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나의 길을 벗어난 적이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나를 이런 식으로 벌주시기를 원하는가? 왜 그분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있는가? 왜 그분은 나를 떠나서 내가 이러한 생각들에 답을 찾을 수 없는가? 그분이 나를 시험하기를 원하시는가? 그러면 어디에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는가? 멍청하게 되어 나의 두뇌 사용을 중지하면 이 시험에 통과할까? 그렇다면 왜 그분은 내게 두뇌를 주었는가? 우둔한 사람만이 믿음의 시험에 통과하는가?

나는 배신당하고 유린당한 것 같았다. 어느 느낌이 우세한지 말할 수 없다. 때로는 황당하고 슬프고 의기소침하였다. 신앙이 거짓일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달콤하다. 믿는 것은 매우 위안이 된다. 나의 슬픔과 상실의 느낌을 나란히 놓으며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신기하게도 나는 더 이상 혼란스럽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꾸란이 사기이고 무함마드는 사기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른 활동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바쁘게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댄스 교습까지 받았고 살아있다는 것과 죄책감에서 해방된 것과 인생을 즐기고 정상적으로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하였다. 내가 얼마나 많이 기회를 놓쳤는지 그리고 얼마나 어리석게 인생의 단순한 즐거움을 내 자신으로 부터 박탈하였는지 알게 되었다. 물론 부인은 사이비종교 집단들이 그들의 통제를 신자들에게 행사하는 방법이다. 나는 자신에게 인생의 가장 단순한 즐거움들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었고 이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침에 잠자고 춤추고 데이트하고 한 잔의 와인을 마시는 것과 같은 즐거움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분노

 

이때에 나는 깨어남이라는 영적여행의 다른 단계로 들어갔다. 나는 분노했다. 너무 많은 세월동안 그러한 거짓들을 믿은 것에 대한 분노, 야생거위를 쫓아다니느라고 내 인생을 너무 많이 낭비해버린 것에 대한 분노였다. 나를 배신한 문화와 그것이 내게 준 잘못된 가치들에 대한 분노, 내게 거짓을 가르친 나의 부모와 전에 생각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거짓을 믿은 것에 대한, 사기꾼을 믿은 것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나를 무너지게 하고 간섭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퍼져나갔던 거짓들을 중지시키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분노였다.

대단한 헌신을 위하여 사우디아라비아에 갔던 수 백 만의 무슬림들의 사진을 볼 때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지(메카순례)를 위하여 그들의 평생 저축한 돈을 소비한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을 만들어낸 거짓들에 분노했다. 누군가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것을 읽을 때 무슬림들이 선전하며 커다란 이슈를 만들어낸 것을 읽을 때 나는 슬프고 분노했다. 그 불쌍한 영혼에 슬펐고 그 거짓들에 분노하였다.

이 거짓을 보호하며 그것을 옹호하며 아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면 그 사람을 욕하기까지 하는 전 세계에 대하여 분노하였다. 무슬림만이 아니라 이슬람을 믿지 않는 서방세계 사람들까지도 그렇다. 이슬람을 제외한 모든 것은 비방해도 OK이다. 나를 놀라게 만들고 더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이슬람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려 할 때 내가 직면하는 저항이다.

다행히도 이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사도가 아닌 사기꾼일 뿐이며 그의 의도가 오직 사람들을 속여서 자신의 자아도취적 야망을 만족시키려 하는 선동가라는 것을 알았다. 불타는 지옥과 와인과 밀크와 꿀의 강들이 있는 천국과 향락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은 지배하여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 필사적으로 필요한 병적이고 거칠고 불안정하고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의 상상력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의 부모님들에게 분노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최선을 다했고 그들이 최선이라고 배운 것을 내게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나의 사회 또는 문화에 분노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나의 국민들도 내 부모와 나와 마찬가지로 단지 잘못된 정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얼마간 생각한 후에 나는 모두가 피해자라는 것을 알았다. 10억 또는 더 이상의 피해자가 있다. 가해자가 된 사람들도 또한 이슬람의 피해자들이다. 그들이 이슬람이 무엇인지 모르고 잘못되었을지라도 정직하게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고 믿는다면 내가 어떻게 무슬림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무함마드 나르시스트

 

무함마드는 어떤가? 그가 거짓말하고 속이고 사람들을 잘못 인도한 것에 대해 분노해야 하는가? 죽은 사람에게 어떻게 분노할 수 있는가? 무함마드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감정적으로 병들은 사람이었다. 그는 8살이 되기 전에 5명의 다른 양부모를 가졌던 고아로 자랐다. 그가 누군가에게 정을 붙일만하면 떼어져서 다른 사람에게 보내졌다. 이것이 그에게 힘들었을 것이고 그의 정신건강에 해로웠다. 사랑과 소속감이 박탈당한 어린아이로 그는 두려움과 자신감 결핍의 깊은 감정들과 같이 자랐다. 그는 나르시스트가 되었다. 나르시스트는 어린 시절에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랑을 수용할 수 없지만 대신에 관심과 존경과 인정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이들이 그를 보는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본다. 그 인정이 없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사람들을 조종하기를 원하는 불쌍한 거짓말쟁이이다.

나르시스트들은 과대망상자들이다. 그들은 세계를 정복하고 모든 사람을 지배하기를 원한다. 그들의 과대망상적 몽상에서 그들의 자기도취는 만족된다.

일부 유명한 나르시스트들은 히틀러, 뭇솔리니, 스탈린, 사담 후세인, 이디 아민, 폴 포트, 모택동이다. 나르시스트들은 지적이지만 감정적으로는 폐인이다. 그들은 굉장히 불안한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아주 높은 목표를 세운다. 그들의 목표는 지배와 권력과 존경을 추구한다. 그것들이 무시되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르시스트들은 속기 쉬운 그들의 희생자들을 지배하기위하여 종종 구실을 찾는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그 구실은 당과 인종이었고 뭇솔리니에게 있어서 그 구실은 파시즘 또는 다른 민족들에 대항한 민족의 단결이었고 무함마드에게 있어서 그 구실은 종교였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권력에 대한 그들의 요구에 있어서 수단들이었다. 자신들을 내세우는 대신에 그 나르시스트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명분들의 유일한 권위이며 대표자임을 내세우면서 명분과 이념 또는 종교를 내세웠다. 히틀러는 독일국민이 자신을 한 개인으로 사랑하지 말고 자신이 총통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존경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무함마드는 아무도 그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알라와 그의 사도에게 복종하라고는 쉽게 요구할 수 있었다. 물론 알라는 무함마드 자신의 변경된 ego였기 때문에 모든 복종은 결국 그에게 귀속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이고 자신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삶을 지배할 수 있었다.

“악성의 자기 사랑-자아도취 다시 보기(Malignant Self Love - Narcissism Revisited)”의 저자인 Sam Vaknin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가 자아도취자이다. 자아도취는 건강한 현상이다. 그것은 생존을 돕는다. 건전한 자아도취와 병적인 자아도취와의 차이는 정말로 다르다. 병적인 자아도취와 그것의 극단적인 형태인 NPD (Narcissistic Pathological Disorder)는 극도의 공감 부족에 의하여 특정되어 진다. 자아도취자는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먹을 대상으로 간주하고 대우한다. 그는 자아도취적 공급을 얻기 위해 그들을 사용한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이러한 과대망상적인 환상에 빠져있기 때문에 자신이 특별대우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다. 그 자아도취자는 자신을 모른다. 그의 인지작용과 감정은 왜곡되어 있다.”

위에서 말한 것들이 무함마드를 완벽하게 묘사한다. 무함마드는 감정이 없는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아무 소용가치가 없다고 결정하였을 때 그는 그들에게 아첨을 중지하고 그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는 Bani Qurayza 족의 모든 남자들을 집단학살하였고 아라비아에서 다른 모든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추방하고 살해하였다. 정말로 하나님이 이러한 민족을 멸망시키기를 원하였다면 그분은 그의 사도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에 죽은 감정적으로 환자인 사람에게 분노할 이유가 없었다. 무함마드는 그의 민족의 어리석은 문화와 그가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그의 인생의 첫 해에 그를 돌보는 대신에 그를 베두인 여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새 남편을 찾았던 그의 어머니의 무지의 희생자였다.

무함마드는 깊은 감정적 상처를 가진 사람이었다. Vaknin 박사는 “자아도취자는 ‘불가촉성’과 감정적 면역성과 정복불능성을 투영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한다. 자아도취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인생보다 크다. 그가 공손하다면 그는 공격적으로 공손하다. 그의 약속은 색다르고 그의 비평은 폭력적이고 불길하며 그의 관대함은 공허하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이 무함마드가 자신에 관하여 보여준 그 이미지가 아닌가?

무함마드가 환자였으며 선지자가 아니었고 그가 단지 빈곤자였을 때 그의 과장된 약속들과 위대한 민족들을 정복하고 복속시키겠다는 그의 인상적인 꿈들이 그의 병적이고 감정적으로 복잡한 정신 상태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별하지 못한 7세기의 무지한 아랍족들을 나는 비난할 수 없다. 마지막 세기에 수 백 만의 독일인들이 무함마드와 같이 과장된 약속을 하였고 무자비하였고 사람들을 조종하였고 무함마드와 같이 야심에 찬 또 다른 자아도취자의 카리스마에 먹이가 되었는데 어떻게 무함마드와 같은 사람에게 먹이가 된 그 무지한 아랍족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진지하게 생각한 후에 나는 내가 분노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모두 동시에 피해자이며 가해자라는 것을 알았다. 범인은 무지이다. 우리의 무지 때문에 우리는 사기꾼들과 그들의 거짓을 믿고 그들이 거짓 신들과 이념 또는 종교의 이름으로 우리들 가운데 증오를 퍼트리는 것을 허용한다. 이 증오가 우리 서로를 분리하며 우리가 하나이며 우리가 모두 서로 간에 상호의존적으로 관계되어 있고 인류의 모든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만든다.

이때 나의 분노는 공감과 동정과 사랑의 심오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나는 인간들을 편을 가르는 이 무지와 싸우기로 자신에게 약속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분열에 대하여 정말로 대가를 지불하였고 지불하고 있다. 이 분열은 무지에 의하여 야기되었고 그 무지는 자신을 위한 목적으로 감정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개인들에 의하여 조작된 거짓 신앙들과 사악한 이념들의 결과이다.

이념들은 우리를 분리한다. 맹신은 분열과 증오와 싸움과 살인과 적대감을 야기한다. 인류의 구성원들로서 우리는 이념과 신조와 종교가 통합될 필요가 없다.

나는 인생의 목적이 믿는 것이 아니고 의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진리는 배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진리는 단지 경험되어질 뿐이다. 실제로 어느 종교, 철학 또는 교리가 당신에게 진리를 가르쳐 줄 수 없다. 진리는 우리의 동료 사람들에게 가지는 사랑 안에서, 어린아이의 웃음 안에서, 교제 안에서, 부모와 아이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우리의 관계 안에 있다. 진리는 이념들 안에 있지 않다. 진실한 유일한 것은 사랑이다.

 

종합

 

믿음에서 깨우침으로 가는 과정은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수피주의에서 용어를 빌려와서 그것을 깨우침의 일곱 계곡으로 부르자. 신앙은 무지 안에서 확고하게 되는 단계이다. 당신이 충격 받고 그것에서 쫓겨날 때까지 행복이 넘치는 무지의 단계 안에 계속 머무를 것이다. 이 충격이 첫 번째 계곡이다. 충격에 대한 자연스러운 첫 반응은 부인이다. 부인은 방패와 같은 역할이다. 그것은 그 고통을 완화하고 당신의 안전지대로부터 나오는 고통에서 당신을 보호한다. 그 안전지대는 우리가 편안함을 느끼는, 우리가 친숙한 모든 것을 찾는, 우리가 새로운 도전들 또는 알지 못하는 것에 직면하지 않는 장소이다. 이것이 두 번째 계곡이다.

성장은 안전지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전진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안전지대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충격을 받지 않으면 그것을 하지 않으려한다. 부인함으로 충격의 고통을 완화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 순간에 우리는 다른 충격이 필요하고 우리는 다시 다른 부인으로 우리 자신을 방어하려 할 것이다. 더 많이 사실에 노출될수록 더 많이 충격을 받을수록 더 많은 부인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부인이 사실들을 제거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단지 우리를 순간적으로 막아준다. 우리가 사실에 노출되었을 때 어떤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계속하여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갑자기 우리는 우리의 방어벽을 계속하여 세우지 못하게 될 것이고 부인의 방호벽은 무너질 것이다. 우리의 머리를 모래 속에 영원히 감 출수 없다. 일단 의심이 자리 잡으면 그것은 도미노 효과를 가질 것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피하고 부인하였던 사실들에 의하여 모든 방향에서 두들겨 맞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갑자기 우리가 받아들이고 옹호하기까지 하였던 모든 불합리성들이 더 이상 논리적이 아니며 우리는 그것들을 거부한다.

우리는 그다음 고통스러운 혼란의 단계로 들어가며 그것이 세 번째 계곡이다. 전에 믿음이 비합리적이며 어리석으며 받아들일 수 없지만 우리는 의지할 것이 없다. 나는 이 계곡이 믿음에서 깨우침으로 가는 여정에서 가장 을씨년스러운 단계라고 믿는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깨우침을 발견하지 못하고 우리의 믿음을 잃는다. 우리는 기반이 없는 곳에 서있다. 우리는 자유 낙하를 경험한다. 우리는 도움을 구하지만 우리가 얻는 모든 것은 어떤 무의미하고 상투적인 것의 재탕이다. 우리를 도우려고 하는 사람들도 스스로를 잃어버린 사람들임에도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믿는다. 그들이 제시하는 논거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그들은 우리가 질문하지 말고 믿기를 원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믿음의 모범을 가져온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믿음의 강도가 그들이 믿고 있는 진리를 증명하지 않는다.

이 혼란은 네 번째 계곡인 죄책감으로 바뀐다. 당신은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낀다. 당신은 의심하고 질문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당신은 발가벗기었고 당신의 생각에 대하여 수치심을 느낀다. 당신은 꾸란에 언급된 불합리성들이 당신에게 이치에 맞지 않다면 그것이 당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버렸거나 그분이 당신의 믿음을 시험한다고 생각한다. 이 계곡에서 당신의 감정과 지성에 의하여 자신이 분해된다. 감정들은 합리적이지 않지만 그것들은 극도로 강하다. 당신은 무지의 낙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필사적으로 믿기를 원하지만 할 수 없다. 당신은 생각하는 죄를 범하였다. 당신은 지식의 나무에서 금단의 열매를 먹었다.당신의 상상의 신에게 분노한다.

마침내 당신은 아는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결정한다. 그 죄책감은 당신에게 속하지 않는다. 당신은 해방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당신을 무지 속에 있게 하고 시간을 낭비하게 한 모든 거짓들에 대하여 낙담한다. 이것이 깨어남의 단계이다. 동시에 당신은 슬픔에 휩싸인다. 당신은 해방감을 느끼나 평생을 감옥에 있다가 나온 것같이 당신은 깊은 우울증에 휩싸인다. 당신은 외로움을 느끼고 당신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잃었다. 당신은 잃어버린 시간을 생각한다. 당신은 이 무의미한 것을 믿고 그것을 위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희생한 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역사의 페이지들은 여호와, 알라 또는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죽은 사람들의 피로 기록되었다. 모두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 거짓을 위하여!

그래서 당신은 여섯 번째 분노의 계곡으로 들어간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그 밖의 모든 것에 분노하게 된다. 당신은 그러한 거짓들을 믿으며 얼마나 많은 귀중한 인생을 잃어 버렸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그다음 당신은 여기까지 온 당신이 행운아이고 여전히 스스로를 부인함으로 방어하며 그들의 안전지대에서 나오는 모험을 하지 않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여전히 첫 번째 계곡의 수렁 속을 걷고 있다. 이 단계에서 당신이 완전히 믿음과 죄책감과 분노에서 해방될 때 당신은 궁극적인 진리를 이해하고 인생의 신비들을 해결할 준비가 되어있다. 당신은 공감과 동정으로 충만하다. 당신은 깨어날 준비가 되어있다. 그 깨어남은 진리는 종교 또는 사이비이단 안에 없으며 우리 동료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 그리고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알 때 온다. 당신은 진리가 길이 없는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을 거기에 데려다줄 선지자 또는 지도자는 없다. 당신은 이미 거기에 있다.

이 오랜 방랑 여정에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을 떠나지 않을 성가신 동료가 있다. 그는 당신의 전진을 저지하여 당신이 앞으로 가는 것을 정지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당신의 두려움인데 처벌과 지옥과 죽음 이후에 관한 두려움이다. 그것은 완전히 비합리적이지만 당신을 조정하고 그 여정의 모든 단계에서 당신의 잠재의식에 역사한다. 믿음에서 깨어남으로의 여정은 험난하고 당신의 두려움을 없애지 못한다면 당신은 첫 번째 단계로 나갈 수 없다. 당신이 단지 목적지에 도착하고 깨우쳤을 때 당신은 그 두려움들을 완전히 제거 할 것이다. 그때에 당신은 두려움의 사슬을 부수고 깨우침의 날개들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해방이다.

 

2001년6월25일

 

원문보기 http://www.faithfreedom.org/Articles/sina/frombelief.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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