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은 왜 기독교인이 되기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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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드 알-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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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목차
Ⅰ. 복음으로 가는데 있어서 이슬람의 장애물 세 가지
Ⅱ. 알라는 누구인가?
Ⅲ. 이슬람 사고의 유형들
Ⅳ. 씨족의 힘
Ⅴ. 改宗(개종)에 대한 나쁜 의식
Ⅵ.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건너가기
Ⅶ. 기독교 교회에서의 改宗(개종)자
Ⅷ. 기독교적 삶으로 순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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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 전에 이슬람은 근동의 대륙을 연결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이슬람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종교가 되었다. 무함마드의 종교는 기독교의 선교 노력에 저항하였고 오늘날 우리는 이슬람의 세계선교비전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분쟁과 무슬림이 기독교인이 되려고 할 때 맞이하는 어려움들을 생각해보는 것이 시급한 이유이다.
Ⅰ. 복음으로 가는데 있어서 이슬람의 장애물 세 가지
하나님이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자신과 동일한 아들을 가지는 것은 무슬림에게 있어서 생각도 할 수 없다. 아주 어릴 때부터, 무슬림은 기독교인들이 세 명의 신을 경배한다는 가르침으로 세뇌되어있다. 무슬림에게 셋이 하나가 된다고 가르치는 자는 누구든지 이해력이 결핍된 자로 여겨질 것이며 이것을 결국 노골적인 증오로 발전할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든지 세 분이든지 둘 중 하나라고 무슬림은 생각하며 동시에 셋이며 하나라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어려운 개념과 서방세계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설명하려고 이용하는 이야기는 무슬림의 생각으로 거의 이해할 수 없다. 무슬림은 세 가지 위격을 가지신 한 분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꾸란에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하여 분명한 내용이 있다. 한 예는 처녀 마리아에 의한 그의 출생이다. 그러나 무함마드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알라의 창조적 말씀을 통하여 마리아 안에서 無(무)로부터 피조 되었다. 반대로,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창세전부터 영원 속에서 존재하였다고 말한다. 예수는 성부에게서 났으며(피조 되지 않았다), 진정한 하나님에게서 난 진정한 하나님이며, 본질에 있어서 성부와 하나이다.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 불행하게도 무함마드의 시대와 그 이전 시기에 근동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출생과 본질에 관한 비슷한 문제로 씨름하였다.
그러한 기독교 논리적 다툼들의 잔재가 꾸란의 다른 곳들에서 발견된다. 그리스도는 “알라의 말씀”이고 “그 분의 영”이라고 호칭된다. 이슬람 신학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한가 아니면 유한하게 피조 되었는가의 문제에 관한 토론들이 많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는 영원하지만, 이것은 예수가 무함마드 보다 훨씬 위대하다고 알려지는 것이 두려운 무슬림들이 무시해야 할 계시이다. 이슬람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영이다. 요한일서 2장22절과 4장3절에 따르면,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표시이다.
복음으로 가는 이슬람의 두 번째 장애물은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는 무슬림의 주장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에 대한 이슬람의 비판은 그 의미 또는 예수 죽음의 열매에 관한 것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 자체를 완전히 부인한다. 한 영에 이끌린 무함마드는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지 않았고 산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것으로 무함마드는 이슬람 세계의 사상으로 예수의 부활, 성령의 강림, 신자의 중생, 칭의, 구원, 성화와 같은 기본적인 개념들을 거부한다. 이슬람의 진정한 특성은 십자가를 일관되게 부인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십자가에서 그분의 대속적 죽음의 선행요건으로 보는 반면에 무함마드는 성육신과 십자가를 둘 다 부인한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음 사건이 복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무슬림에게 말한다면, 이슬람과 기독교를 분리하는 세 번째 장애물에 바로 도달하는데 “계시(성서)의 이해”이다! 무슬림들은 성경이 알라가 준 거룩한 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무슬림 학자들은 성경과 꾸란 내용 가운데 모든 모순은 원래 계시된 성경이 변질된 증거들이라고 말한다. 이슬람의 본문 비평은 어느 구절이 변질되었다거나 어떤 문학 자료들이 성경을 보충하였는지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꾸란이 하나님의 진리를 담은 유일하며 확실한 경전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꾸란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변질되고 진실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거룩한 복음이 가장 중요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죽음 없이 그리스도가 하늘로 승천하는 것은 이러한 근거위에 증명된다. 무슬림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가까운 선지자였고 십자가 위에서 죽지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다!
Ⅱ. 알라는 누구인가?
복음으로 가는데 있어서 이슬람의 장애물 세 가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중요한 문제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깊다. 그것은 알라의 신성에 관한 개념에 숨겨져 있으며 그것이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알라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며 이해가 불가하며 접근이 불가한 존재이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며 우리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는 자식을 낳지도 않으며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와 동등한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리에게 태어난 예수의 출생은 알라에 대한 생각도 할 수 없는 모욕으로 경멸한다.
이슬람에서 하나님의 개념은 이슬람 문화의 모든 면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모든 무슬림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막는 영이다. 이슬람 사고에 따르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 분의 종으로 만들어졌다. 이슬람에서 기도하는 동안 취하는 엎드리는 자세는 이슬람이라는 단어의 해석을 나타낸다. 그것은 알라에 대한 항복, 복종, 헌신을 의미한다. 무슬림이 기도를 생각할 때, 그는 하나님과 자유스러운 대화를 상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배의 모든 것들이 기술된 예식서 속으로 통합되는 자신을 본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알라 앞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 이 기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무슬림의 잠재의식에 각인된다. 기독교 기도의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두 종교 사이의 가장 넓은 차이를 발견한다.
알라는 너무나 위대해서 오직 알라만 모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행운, 사고, 실패, 죽음은 많은 경우 알라에게서 기인한다. 운명론은 이슬람에 깊이 각인되어서 개인의 행위와 책임을 배제한다. 지성과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지에 의하여 억제된다. 삶에 대한 무슬림의 태도는 기독교인의 것과 아주 다르다.
이슬람에서 죄는 인간이 죄를 지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요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죄는 알라가 인간을 연약하고 쉽게 유혹을 당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넘어짐 또는 실수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알라는 세상의 악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 알라는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람을 낙원에도 보내고 지옥에도 보낸다. 알라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그에게서 탈출도 할 수 없는 독재자와 같다. 무슬림의 모든 생각과 결심은 완전히 예정되어있다.
결과적으로, 십자가는 알라에게 필요 없으며 그의 주권에 대한 공격으로 보여 진다. 알라는 세상이 자신과 화해하기 위하여 제사도 중재자도 필요 없는데 자신이 원하면 누구라도 언제든지 용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독재에 대한 이슬람의 이해는 무슬림과 기독교인을 분리하는 근본적인 요인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 경직된 사고가 이슬람 문화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많은 세기 동안 남자는 부족장과 같이 부인과 자녀를 다스렸고 선생은 학생을 다스렸다. 고용주는 많은 경우 칼리프와 술탄과 마찬가지로 노예 소유주와 닮았는데 칼리프와 술탄은 빈번히 잔혹한 권력을 무제한으로 행사하였다.
병들고 약하고 가난한 자들은 알라에게 벌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알라는 강한 자, 부자, 승리하는 자를 인정한다. 기독교인의 겸허한 삶, 예수의 십자가, 자신의 약함에 대한 바울의 자랑은 이슬람의 영과는 정반대이며 기독교를 퇴보된 열등한 종교로 보이기 만든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버지이며 타락한 세상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아들을 내주었다는 생각은 무슬림에게 이상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신성모독이 아니라면 웃기는 이야기이다! 대신에 가까이 갈 수 없으며 전능하시며 위대하신 신은 경배를 받으며 경외함을 받는다. 가까이 갈 수 있는 하나님과 아버지와 같은 그분의 보살핌에 관한 모든 주장은 자기 속임수로 간주된다. 장래의 이슬람 낙원에서 알라는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알라는 항상 자신의 피조물들과 멀리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 예수 안에서 자신을 나타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으로 간주된다.
Ⅲ. 이슬람 사고의 유형들
아랍에서 하나님에 관한 꾸란의 개념은 특별한 사고방식을 형성하였다. 다른 많은 영향들이 무슬림의 사고방식과 정신세계를 형성하였지만 전형적인 이슬람 사고방식은 반복적으로 지속되었다.
이것은 영감에 대한 이해에서 보여질 수 있다. 영감에 대한 우리 기독교 개념은 듣는 것,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것, 깨우침인데 깨우침은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계시된 말씀에 대한 책임감과 연합된다. 그러나 영감에 대한 이슬람 개념은 급진적이다. 알라는 무함마드에게 그의 계시를 말씀마다 불러주었고 거의 의식이 없는 선지자는 그의 수라(꾸란의 장)를 한 영의 힘이 없는 도구로서 말하였다. 그의 예언은 가장 높은 지혜와 가장 깊은 지식이 인간에게 제시되는 모든 계시의 결론으로 간주된다. 무슬림은 결함이 있는 종교에 소속하였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며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존경으로 모든 인간을 축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시된 말씀에 대한 존중으로 꾸란을 번역하거나 수라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거의 금지되었다. 모든 계시는 분명하고 이해가능하며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오늘 날에도 알라의 말씀을 추측하거나 판단할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받아들이고 성실히 지킬 수 있지만 절대로 토론이나 비판할 수 없다. 꾸란은 정확히 이해함이 없이 마음으로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암기된다. 이 정적인 사고방식은 현대의 대학들과 학교들에서 배움의 과정에 영향을 주었다. 일부 교육받은 아랍인들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 지식은 그들의 잠재의식에서 일하지만 역동적인 토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랍 세계의 모든 서방세계 선생은 아랍인의 마음에 암기된 지식이 독립된 사고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사고의 진전은 능동적인 추론 또는 반영으로 거의 체계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사고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은 전통(알-하디스: 무함마드와 그의 동료들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전통들을 모은 이슬람 자료들)에 의하여서도 결정되었다. 자기 지성으로 꾸란을 해석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해석을 적용하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오직 알라만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럼으로, 모두 무함마드 또는 그의 원래 무슬림 공동체로부터 계속하여 사람에 사람을 통하여 전통과 보고를 전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목록이 길다. 무슬림들은 전통에서 확립된 많은 행위 규칙들의 준수에 집착한다. 그럼으로, 하디스의 존재는 자유로운 사고는 기본적으로 이슬람에서 배제된다는 표시이며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 서방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에 더하여서, 꾸란은 아랍어로 외우기 쉽고 호감이 가는 일종의 운율로 기록되었다. 때로는 운율을 위하여 무함마드는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삽입하거나 운율의 강세를 위하여 음절을 바꾸었다. 정확한 내용은 소리보다 나중이었다.
이 시적인 원리에 근거하여, 체계적인 논리가 아닌 호감이 가는 소리와 시적인 형태에 근거하였던 감정이 아랍인들에게서 유래되었다. 성경은 다르게 만들어졌다. 성경은 시의 형태가 아닌 산문의 형태로 기록되었고 사고와 탐구와 이해를 요구한다. 꾸란은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기록되었고 반면에 성경은 무함마드 시대 이후에 세련되지 않게 번역된 아랍어로만 읽을 수 있었다. 성경은 무슬림의 귀에 이상하고 불경하게 들리지만 꾸란은 기록된 어떤 것에도 뒤지지 않는 빛나는 시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무슬림은 성경을 이해할 수 없고 그가 세상을 보는 토대로 성경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성경에서 멜로디 운율을 들을 수 없고 성경을 읽는 것은 변화의 결심 또는 자신의 삶에 관한 생각을 거의 만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실된 말씀이 무슬림들의 잠재의식을 채우기 위하여 복음을 제시하고 선별된 성경의 말씀들을 외우도록 하는 방법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 사고와 의식이 그들 가운데 여러 차례 개발되어야 한다. 냉정하고 교리적인 설교를 하는 목사가 아니라 생명과 성령으로 함께 하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행복하다. 아랍인들에게 복음의 이해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통하여 전해진다.
Ⅳ. 씨족의 힘
무슬림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막는 또 다른 장애물은 그와 연장된 가족과의 결속이다.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독립된 자신에 관한 의식이 없으며 그들의 씨족 안에서 “우리”에 뿌리를 묻고 산다. 이것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이다.
서양은 연장된 가족(우리)안의 동료의식에서 개인(나)의 고립으로 퇴보의 사다리를 내려왔는데 그 순간 그 개인은 무명의 집합체 속에 빠지며 그곳에서 그 개인은 다른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할 뿐이다. 그들의 집단적 “우리”의식을 가진 개혁의 찬가와 그들의 “나”를 언급하는 계몽의 찬가는 이 과정을 분명히 보여준다. 오늘날 번영하는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대중의 힘에 영향을 받는다. 여전히, 대중 속에서 이 분열의 상황은 아랍인들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사교모임, 클럽, 취미모임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대부분 아랍 국가들은 씨족에서 개인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있다. 서방세계 물질주의 침투를 통하여 자신에 대한 의식이 서서히 개인들 가운데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이 가족들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까지, 소수의 아랍인들만이 그들의 씨족에서 벗어났다. 대다수는 여전히 아버지, 삼촌들 또는 형제들과 함께하는 동료의식을 기반으로 사고를 한다. 많은 경우 젊은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지 않는데 아버지가 그에게 충고하고 그에게 가장 맞는 사람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신앙도 씨족의 문제이고 개인이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럼으로, 무슬림이 자신의 종교를 떠날 때, 자기 가족에게 커다란 수치를 가져오며 그가 출생할 때부터 단단히 뿌리를 박았던 “우리”로부터 단절된다. 무슬림이 종교를 버리는 것은 우리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깊고 긴 과정이다. 그것은 많은 개종자들을 외롭게 만들고 절망하게 하며 자살을 생각하게 한다.
아랍인들의 절반은 20세 이하이다. 현대의 학교, 대학, 영화, 기술, 전쟁은 이슬람 문화에 저항할 수 없는 대변동을 만들고 있다. 아랍의 큰 도시들에서, 고층빌딩들이 살아있는 탑과 같이 사막에서 솟아오르고 있다. 모든 씨족들은 계속하여 함께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는데 아파트가 둘에서 네 명의 자녀를 가진 가정을 위하여 계획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보장이 필요해지고 있는데 씨족의 부양능력 체계가 와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롭고 새로운 영적인 고향과 내적인 안정을 찾고 있다. 이슬람 사회에서 이러한 변화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에 없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Ⅴ. 改宗(개종)에 대한 나쁜 의식
모든 역경들에도 불구하고 무슬림이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오기 시작할 때마다(보통 18세에서 25세 사이), 그는 이슬람에서 가장 기본적인 죄와 직면한다. 알라를 제쳐놓고 신들을 숭배했던 자들이니 참혹한 고통 속으로 던져버리라(수라 까프 50:26), 믿음을 가진 후 배신을 하고 배신에 배신을 일삼는 자는 그들의 회개가 수용되지 않나니 그들은 길을 잃고 방황자가 될 것이라(수라 알 이므란 3:90)
더하여서 교리, 논리, 가족의 모든 압력들이 자기 자신 의식의 소리로 들려서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에게 건너가지 못하게 한다.
이슬람은 전도가 이루어지기 전에 복음이 알려지지 않은 남양 제도나 불교지역과 같은 다른 국가들의 종교와 비교될 수 없다. 이슬람은 기독교 이후에 생겨난 종교로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들었고, 의식적으로 그분을 주 그리고 구세주로 거부하였고, 적그리스도의 권세로 발전되었다. 그러한 종교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면역되었다. 그들은 어린나이에 복음의 가르침에 대하여 백신을 접종받았다. 다른 영이 그들을 사로잡아 그들은 집단적 소유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용적인 용어로, 집단적 소유물이라는 것은 무슬림이 그리스도에게 다가설 때, 그가 계시(성경)와 계시(꾸란) 사이에 결정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대화는 불가능한데, 꾸란은 알라가 모든 진리를 무함마드에게 말하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복음으로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과 연합하는 자는 새로운 주님과 성령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계시(꾸란)를 거짓으로 버려야 한다. 양측의 대표자들이 그들의 문서들에서 진실을 왜곡하거나 상대방의 가르침을 관용하지 않는다면 꾸란과 복음 사이에 어떤 본질적이며 교리적 문제에도 연결점은 없다.
꾸란과 그것의 터무니없는 자료의 인정을 거부하는 이 과정은 개종자에게 있어서 힘들고 쓰라린 과정이며 강요될 수 없다. 성령의 능력이 절대 필요하며 자라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보다 분명한 분별의 영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무슬림들은 많은 경우 두 가지 계시를 진리로 인정하려 한다. 이러한 자세의 결과는 확실하게 나타나는 정신분열증이거나 곧 사라질 피상적인 믿음이다.
Ⅵ.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건너가기
무슬림이 진지하게 복음에 빠질 때, 오래 동안 감출 수 없다. 먼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와 그 문제를 토론할 것이고, 그 다음 그에게 경고하고 그를 핍박할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들은 떠나고 그를 경멸할 것이다. 부인은 그와 이혼할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자녀들은 더 이상 그에게 속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씨족이 비판적으로 그를 관찰하기 시작할 것이다. 씨족의 이름에 배교의 수치를 가져오지 말라고 요구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젊은 사람에게 경제적 결과를 끼칠 수 있다. 그가 이것에 응하지 않으면 그를 협박하고, 학교를 못 가게하며, 돈을 빼앗고, 매질을 한다. 이것도 그를 제지하지 못하면 가족은 절도나 간음을 했다고 그를 고발하며 그 결과는 감옥이다. 그때는 “친애하는” 가족이 알라를 부인하며 모든 점에서 알라를 안 믿으며 변질된 구성원을 분리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꾸란은 개종자는 죽이라고 명백히 요구한다(수라 알-니사 4:89; 수나 알-나흘 16:106).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는 모두 이 위험에 맞서야 한다. 주요 아랍 국가들에서, 이 위험은 여전하다. 그것이 공개된 개종이 그 국가들에서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서방세계 영향을 받은 아랍 국가들에서 약간의 관용이 서방세계 교육의 범위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이러한 국가들에서 개종자를 처형하지 않을지라도 부모는 자녀가 죽었다고 간주한다. 부모는 그를 이민을 보내서 보이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몇몇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가 있는데 다시 개종자를 살해하려는 것이다. 석유의 힘으로 벌어들인 수십만 달러가 이 변화를 가속시키고 있다.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부모, 형제, 자매, 친척, 친구로부터 내적으로 외적으로 결별은 쓰리고 깊다. 개종은 좀처럼 평화적인 조건으로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오히려 저주받으며 멸시받으며 조롱받는다. 그의 깊은 뿌리에서 “우리”는 취소할 수 없도록 망가진다. 그는 동정을 모르는 세계에서 충격, 거부,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모든 아랍 국가들은 레바논을 제외하고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들의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말한다. 이것은 오직 기독교 소수 공동체가 기독교인으로 남는 것을 허용하고 기독교인이 무슬림이 되는 것은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무슬림은 무슬림으로 남아야 한다.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의 가능성은 법률에서 제공하지 않으며 시리아의 개종인이 한 번 시도하였듯이 정부에 대항하여 소송도 제기 할 수 없다. 지금까지 아랍 무슬림은 이민하여 새로운 국적을 취득하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그의 종교를 바꿀 방법이 없다. 이 경직된 상황은 개종자가 기독교 여성과 결혼하기 원할 때 비극이 된다.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에서, 종교지도자 세이크(sheikhs)나 사제는 결혼 허가를 내어주는 유일한 자들이다. 기독교 여성이 개종자와 결혼하면, 그 부부는 함께 무슬림으로서 세이크 앞에 서야 하며, 이 결혼에서 자녀는 자동적으로 무슬림이 된다.
몇몇 국가들에서, 국가가 관여하여 개종자들의 모임을 금지하고 그 지도자를 감금하며 어떤 경우는 그들을 고문하였다. 최근에 사형은 없었지만 교육을 받지 못한 부모들은 자녀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분노와 증오로 자녀를 살해하려 하였다. 알-아라비(Al-Arabi) 1972년 4월호에 따르면, 모든 아랍인들의 70%가 읽거나 쓰지 못한다. 그러면 교육을 받지 못한 부모들이 광신적으로 암기한 꾸란 구절과 전통들에 집착하는 것은 이해할 만 하다. 무함마드의 영에 순종하여 그들은 자기 자신의 혈육을 증오할 것이다. 알라의 축복에서 배제되지 않고 그들의 문화 공동체에서 계속하여 있기 위하여 그들은 이렇게 한다. 이것 때문에 씨족은 꾸란의 보호자이며 무슬림이 기독교인이 되는 주요 장애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Ⅶ. 기독교 교회에서의 改宗(개종)자
모든 아랍인들이 무슬림은 아니다. 몇 개의 아랍 국가들에서, 기독교 교회는 비잔틴 제국시대이후로 존재하였다. 아랍 국가들에 약1억 명의 무슬림들이 있고 그 가운데 오백만에서 팔백만의 기독교인들이 있다. 이 소수 공동체들은 그들 자신의 기독교 용어를 개발하였다. 이렇게 고립된 기독교 집단들에서, 아랍어를 말하지만 많은 단어들이 무슬림 표준어와 의미가 다르다. 그럼으로, 언어, 습과, 영, 경험은 아랍 그리스도인을 아랍 무슬림과 분리한다.
지난 150년 동안,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러한 동방정교, 콥틱교, 마론파교, 시리아교, 네스토리안교, 가톨릭 지역에 들어왔다. 그들의 영향은 아랍 개신교회에 출석하는 신도가 약 10만 명에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찬송가, 복장, 행동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미국, 영국, 독일의 모 교회를 빈약하게 복제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이슬람 지역에서 기원한 복음적 교회들이 되지 않았다. 아랍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을 분리하는 깊이 갈라진 틈이다. 이러한 기독교인들 가운데 지난 세기들 동안의 박해, 압박, 불신, 감추어진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젊은 무슬림이 많은 내적 갈등 후에 씨족에서 자신을 분리하여 이슬람을 떠날 때, 그는 실직과 도피할 수밖에 없는 가능성에 직면한다. 불행히도 그가 희망을 가지고 아랍 기독교 식구들에게로 돌아선다면 그들 대부분은 그를 멀리하며 비판적으로 보며 불신한다. 그들은 그가 스파이거나 선교사가 세운 학교의 비용이 저렴한 교육을 바라거나 기독교인들 가운데 아름다운 여성을 데려가기 원하거나 몇 개 안되는 직장을 얻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고통을 당하는데 이슬람 세계에서 추방되고 기독교인들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 많은 경우 개종자는 두 세계 사이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집도, 직장도, 명예도 잃는 것이다.
확실히, 무슬림에 대한 아랍교회들의 부정적인 경험들은 비통한 실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찾는 그러한 사람들의 20% 또는 그 이상이 진짜 신자들이다. 이러한 새로운 신자들이 성인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그들을 거부한다. 이러한 실상은 그들에게 깊은 충격을 준다.
교회들과 선교사들이 이슬람에서 기독교의 동료의식 속으로 새로운 얻은 개종자를 통합하거나 그들이 개종자 자신들의 공동체를 세우도록 돕는 일이 계속되지 않으면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모든 개종자는 같은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로 교제할 필요가 있다. 그의 무슬림 가족과 친구들이 그를 버릴 때 그가 잃어버린 소속감의 따듯한 둥지가 그에게 필요하다. 그의 재능에 맞는 직업과 기술도 필요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자는 자선금과 기부금이 필요 없다. 존중을 받으며 자기의 생계를 꾸리고 거지처럼 비굴하지 않도록 그는 직업 교육이 필요하다. 더하여서, 개종자는 믿는 아내가 필요한데 그녀는 그가 기독교 세계관으로 성장하도록 인내를 가지고 돕는다.
불행하게도, 아랍 기독교 교회들은 이전에 무슬림이었던 사람들을 위하여 이러한 세 가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교제와 직장과 삶의 동반자가 없다. 아마도 새로운 개종자를 수도원에 머물게 하는 가톨릭의 접근방법이 최악의 해결책은 아니다! 오늘날 아랍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문제점은 개종자들을 기독교 공동체와 교제로 통합하는 것이다. 무슬림과 최초의 접촉 또는 신앙에 있어서 그의 느린 성장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외관상으로 무슬림으로 남고 은밀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낫다. 이유는 친척이 당신을 추방하면 기독교인들도 당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 때문이다!”라고 서로 간에 말하는 몇 명의 무슬림들을 우리는 안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대부분의 아랍 교회들과 교제 가운데 규칙은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꺼린다. 그럼으로, 무슬림들 가운데 선교의 일을 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아랍 기독교 교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Ⅷ. 기독교적 삶으로 순응
새로운 개종자가 정상적인 기독교적 성품들을 나타내기 전에 그가 가야 할 길은 멀다.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 동안 믿음 안에 있었던 기독교인들도 계속하여 성장할 필요가 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이슬람에서 새롭게 개종한 신자들을 경찰의 눈으로 보지 말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어린 자녀를 씻기고 돌보는 엄마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이전에 무슬림이었던 사람의 잠재의식이 기독교적인 사고로 채워지는 동안 인내의 세월이 걸린다. 오래된 영이 떠나야 하며 새로운 영이 들어와야 한다.
이전에 무슬림이었던 사람의 많은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작업이 필요하다. 개종한 우리 무슬림 형제는 일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개발할 필요가 있는데 그 일을 정확하게, 부지런히, 책임을 가지고, 성실하게 해야 한다. 그의 결혼 생활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섬기었던 태도로 아내를 섬기는 새로운 도덕적 기준과 준비를 받아들여야 한다. 돈은 그의 모든 생각과 소망에 대한 야망으로서 그의 잠재의식 속에서 우상으로 남아있는 것이 허용될 수 없다. 주일을 성수하며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말을 진실하게 하는 실행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는 성화에 있어서 성장이 필요하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성령의 열매가 그의 안에서 무르익는다. 진정한 성장과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헌신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위험은 큰데 그의 신앙이 피상적이고 지성적인 것으로 남을 것이며 절대로 실체가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위험은 그가 절대로 전심으로 이슬람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약해진 새 개종자에게 이슬람 환경이 뒤에서 다가올 것이다.
영적 성장의 초기 단계 동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이슬람으로 돌아가는 위험한 시기가 있다. 개종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을 이상화하며 목사나 사제는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가운데 결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그들을 그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할 것이다. 그들은 이기심, 야망, 강팍함, 인내하지 못함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의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에 그들은 실망하여 “이 기독교인들이 우리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제 개종자들은 다른 교단들과 상이한 선교 원칙들을 알게 되고 또 다른 충격을 경험한다.
기독교인들이 연합하지 않으며 서로 간에 “양”을 훔치고, 모두가 자기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더 거룩하고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그들 자신들의 복음전파 사역으로 인하여 개종하지 않았음에도 강력한 선교역량을 가진 일부 그룹이 열정적인 새로운 개종자를 데리고 와서 많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간증을 요청하거나 그들의 선교잡지에 실을 사진을 찍자고 요청할 때 특히 그 결과는 반대이다. 그러나 그것이 직장 또는 배우자를 찾는데 도움이 될 때 그 새로운 개종자는 신속히 자신이 혼자임을 알게 되고 다시 신앙을 버린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세상적인 관행 때문에, 박해와 고통 가운데 그들의 이슬람 공동체를 떠났던 사람들 가운데 간증과 기쁨이 사라진다.
교회는 그들에게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상호간에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야한다. 겸손과 자기부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시작한다. 자기부인의 길은 내적성장과 진정한 교회의 형성에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에 있어서 능동적으로 되고 살아있는 소망에 거하는 신앙의 성장은 많은 시간과 상담 그리고 생생한 예들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이슬람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직 지속적인 기도를 통하여 변화한다. 그리스도만이 무슬림을 자유하게 만들며 변화시킨다. 설득과 뒤쫓음의 모든 기술들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해방시키며, 깨끗하게 하며, 회생시키며, 무슬림이 사랑에 머물게 해야 한다. 피조물을 새롭게 하는 은혜의 능력만이 이슬람의 권세를 극복한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분의 증인들이 사역에 참여하게 함으로 이 사역을 완수한다. 특히 이슬람에게 있어서, 무슬림에게 인상을 주는 것은 현명한 말씀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와 친근한 가정의 분위기이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인이 되는 무슬림이 아주 적은 이유에 대한 문제는 교회로 다시 돌아간다! 우리가 이유이다! 우리의 적은 믿음, 우리의 약한 기도, 우리의 사랑 없음 그리고 기꺼이 희생하려는 마음의 실종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무슬림이 적은 이유이다. 이전에 아랍 무슬림이었던 skander Jadeed목사는, “모든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이었다면, 오늘날 이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 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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