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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무함마드의 생애: 불편한 진실(1)

작성자 워치독 작성일16-12-08 19:07 조회5,870회 댓글0건

본문

현재의 무함마드에 관한 지어낸 이야기를 포함하여

 

무함마드의 생애 연대표(A.D)

 

570 - 메카에서 태어나다.

576 - 어머니가 죽어 고아가 되다.

595 - 연상의 부유한 과부 카디쟈와 결혼하다.

610 - 40세 때 천사로부터 첫 번째 계시를 받다.

619 - 보호자였던 삼촌이 죽다.

622 -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하다(헤지라).

623 - 메카인 대상들 공격을 명하다.

624 - Badr전투(승리)

624 - 메디나에서 Qaynuqa유대인들을 쫓아내다.

624 - Abu Afak의 암살을 명령하다.

624 - Asma bint Marwan의 암살을 명령하다.

624 - Ka'b al-Ashraf의 암살을 명령하다.

625 - Uhud전투(패배)

625 - Nadir 유대인들을 쫓아내다.

627 - Trench전투(승리)

627 - Qurayza유대인들 집단학살

628 - 메카의 Hudaibiya족과 협약을 맺다.

628 - Khaybar유대인들 멸망과 복속

629 - Muta의 기독교인 나라들에 대한 첫 번째 공격명령을 하다(패배).

630 - 기습공격으로 메카를 정복하다(다른 부족들과 함께).

631 - Tabuk의 기독교인 영토로 두 번째 공격을 이끌다(전투가 없었음).

632 - 사망하다.

 

“무함마드는 자기도취자, 어린아이에 대한 이상 성욕자, 집단 살해범, 테러리스트, 여성 혐오주의자, 호색가, 이단 교주, 광인, 강간범, 고문기술자, 암살범, 약탈자이다.”

전 무슬림 Ali Sina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슬람 자료에 근거하여 입증할 수 있는 사람에게 5만 달러를 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 상금은 아직도 남아있다.

 

서 론

 

당신이 아는 한 사람이 하나님이 일상적으로 그에게 오직 그에게만 말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하고-그가 받았다고 주장하는 “계시들”이 대부분 그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그의 상대적인 중요성에 관한 것이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 자칭 예언자가 하나님이 그가 모든 인간들을 위한 ‘완벽한 모범’이라고 선언하였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그의 정욕을 채워줄 여자들과 노예들 모두를 포함하여 그에게 특별한 권리, 변함없는 복종, 부와 세상적인 욕구를 허용하여야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물들은 아직도 가끔 나타난다. 보다 역동적인 자들 가운데 일부는 추종자들의 작은 집단이 자신들의 지도자 자신의 확신에 너무 취해서 그들은 기꺼이 그가 결혼하도록 자신들의 어린아이를 제공하거나 또는 필요하다면 그를 위해서 살인까지 한다.

그의 추종자들이 살인을 하고 용감하게도 동조하지 않는 자의 재산을 강탈하는데 능숙하다면 그것이 그러한 이단 교주의 메시지를 정말로 유효하게 하는가? 그들이 그런 식으로 점차적으로 그들의 권력을 확장하여 마침내 세계의 주요 종교로 충분히 인정받게 되었다면 어떨까? 그것이 이단 교주의 자신에 관한 주장을 진실로 만드는가? 그것이 정말로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결국은 한 자기도취자의 상상력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바꾸는가?

610년에 명령하는 성격의 한 아랍 상인이 예언자라고 주장하면서 잘 속는 광신자들의 작은 한 이단집단을 매혹시켰다. 그의 “계시들”은 자기 자신에 관련한 것이었고 때로는 모순이 있었지만 그는 천국의 보상에 관한 약속들과 하나님의 분노에 관한 위협으로 그의 추종자들을 조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말만 듣는 그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성적인 쾌락을 위해서 어린아이들을 그에게 주고, 그리고 결국에는 그를 배반하는 자들을 끔찍하게 살해하라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무함마드의 연구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존경심으로 또 하나는 의심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의심으로 접근한다. 그들은 오늘날 세계의 무슬림 신자들의 숫자 또는 그들의 믿음의 힘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진실을 결정하는데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사실만을 살핀다.

무함마드의 생애와 이슬람의 기원에 관하여 여기에 제시된 사실들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의존하고 있는 초기 무슬림 전기 작가들의 저작에 의하여 충분히 뒷받침 된다.

 

기 원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이 생겨난 거친 환경을 이해하여야 한다. 무함마드 당시(b.570 AD)의 아라비아 반도는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과 엄청난 열기 그리고 밤에는 차가운 냉기로 인하여 불모지이며 황폐한 지역이었다. 식물이 거의 성장할 수 없었으며 유목민들이 들쭉날쭉한 바위들과 이동하는 모래언덕 사이에 살았다.

유럽과 중동의 대부분이 도로와 관개용 운하와 수로와 그리고 철학적 강연과 극장을 포함하는 문화를 가지고 로마제국에서 비잔틴제국으로 변하고 있었던 반면에 아라비아인들은 그들 자신의 거친 환경을 넘어서 나머지 세계에 기여한 것이 거의 없이 부족들 간의 전쟁 속에서 짧고 잔혹한 삶들을 살았다.

이것이 부분적으로 이슬람의 음악과 예술에 대한 선천적인 적대감을 설명하는데 탈레반과 같은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음악과 예술을 철저히 적대시 한다. 이슬람은 이슬람 이외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장려하지 않는다. Oriana Fallaci가 말하듯이 “이슬람은 종교만을 위한 종교이다.”

적대적인 기후는 아라비아반도를 정복과 문화적 영향으로부터 보호하였지만 페르시아인들이 아라비아반도의 해안지역을 따라서 문자 도입을 시도하였고 그것이 아랍어의 기원이 되었다. 어느 외국군대도 그 사막의 전사들에게서 양과 염소를 빼앗는 것이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지역은 상대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리스 부흥이후 나머지 세계가 경험하였던 지식의 르네상스는 대부분 아랍족들이 놓쳤고 그들의 모든 에너지는 무자비한 환경과 다른 부족들에 대항하는 매일 매일의 생존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사림들에게 있어서 도덕성은 단지 필요에 의해서 규정되었고 의무는 자기부족을 초월하여 확장되지 않았다. 이것이 어떤 행위의 윤리가 무슬림들에게 유익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하여 결정되는 도덕적인 원리를 포함하여 이슬람 외부의 사람들에 대한 이슬람의 태도 발달에 대한 비평적 근거이다.

아라비아에 다신교 전통들이 있었고 특히 메카의 무함마드 출생지와 같은 상업중심지에 자리 잡은 자들 가운데 그러했다. 이러한 도시들 가운데 일부는 신성한 달들 동안에 순례자들을 끌어들이는 구조물 같은 카바들(Kaabas)-정육면체-을 가지고 있었다. 메카의 카바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검은 운석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의 우상들을 모셔져있었다.

그 검은 돌에 더하여 무함마드의 Quraish족은 알라라고 부르는 달신을 숭배하였다. 다른 신들도 마찬가지로 인정되었다. 사실 메카라는 도시는 종교적 관용으로 유명하였고 거기에 모든 신앙의 사람들이 와서 카바에서 기도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무함마드가 일단 무력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권력을 얻자 바뀌었다).

이슬람은 이 유치한 다신교도 관습과 무함마드가 [종종 잘못되게]이해한 기독교와 유대교의 기본적 신학 요소들로부터 만들어졌다.(예를 들면 그의 부정확한 기독교의 해석은 종종 당시 시리아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지역의 비주류 이단들과의 초기 경험에 근거한다).

 

메카에서 초기의 삶

 

무함마드는 570년경에 과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그 어머니는 6년 후에 죽었다. 그는 사회의 변두리에서 가난한 고아로 성장하였고 사회는 부족장들과 상인들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그는 낙타를 치는 사람으로 삼촌인 Abu Talib를 위하여 일하였다. 그의 삼촌이 그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무함마드 자신은 그가 25살에 15살 연상이었던 부유한 과부 카디쟈를 만나서 결혼할 때까지 그의 낮은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의 아내의 상업은 무함마드의 천부적인 설득재능을 키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에게 허용이 안 되었던 여행을 하고 지식을 얻을 기회까지 그 성공적인 세일즈맨에게 주었다. 그는 나중에 그가 들은 이야기들, 특별히 먼저 있던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의 이야기들을 알라로부터 “계시들”로 통합함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 기회를 사용하였다.

부유함으로 인하여 편안한 생활과 여유 시간을 가지게 되자 명상과 묵상의 기간을 가지기 위하여 무함마드는 가끔씩 방황하였다. 개인적인 성취와 의미에 대한 욕망을 포함하여 그가 중년의 위기 증상을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나이가 40세에 들어선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꿈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그를 찾아왔다고 아내에게 말하였다. 그렇게 하여 23년 후에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던 일련의 “계시들”이 시작되었다. 꾸란(Qur'an)은 무함마드가 알라에게 속한다고 말하였던 말씀들의 모음이다. 하디스(Hadith)는 무함마드의 삶과 행위들에 관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시라(Sira)는 기록된 그의 전기이다. 순나(Sunnah)는 삶에 관한 무함마드의 방식이라고 말하여지며 이슬람 법(샤리아)는 그것에 근거한다.

그의 아내의 영향력과 지원으로 무함마드는 자신이 아브라함과 예수의 족보와 같은 “족보”를 가진 선지자라고 선언하였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그의 새 종교로 개종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것이 알라의 말이라고 말하며(물론 혼자서만 들은 것으로)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 꾸란을 말하였다.

무함마드의 꾸란은 단 하나의 기본적인 도덕적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세계적인 종교에다 새로운 단 하나의 사상만을 추가하는데 그것은 무함마드가 알라의 예언자라는 것이다. 사실 무함마드의 “알라”는 이상하게도 무슬림들이 무함마드의 모든 세상적인 욕구에 복종하도록 주지시키는데 너무 몰두하여서 이 위임 명령이 꾸란의 이야기 가운데 적어도 20번이나 되풀이된다.

초기에 무함마드는 “알라”라는 호칭아래 그들의 300개의 우상들 모두를 묶는 것과 같이 자신의 가르침과 그 공동체의 어른들의 널리 퍼진 종교들과 타협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무함마드의 유대-기독교 신학과 이교도 전통의 결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좀 더 복잡해졌다. 그는 또한 자신의 지위를 되풀이하여 주장하기 위하여 “알라로 부터의 계시들”을 이용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성경 이야기들을 올바르게 기억하지 못하였으나 각 이야기들은 “사도(무함마드)를 믿거나 아니면 지옥에서 고통을 받으라”는 통상적인 주제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심하게 수정되었다.

 

메카에서 전도와 핍박

 

초기의 무슬림 역사가들에 따르면 메카인들은 무함마드가 자신의 종교를 실천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가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는 것에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다. 이것은 자칭 예언자가 그 사람들의 관습과 조상들을 포함하여 그들의 종교를 공격하기 시작한 후에 바뀌었다(Ibn Ishaq/Hisham 167). 이것은 메카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고 이어서 그들은 무함마드의 허세부리는 주장에 대항하여 그의 비천한 배경을 조롱하였다. (MYTH: Muhammad was Persecuted for Preaching Islam 를 보라).

그 당시 메카는 여전히 상당히 관용적인 사회였다. 메카의 경제가 방문하는 이교도들이 참여하는 연례적인 순례에 의존하였고 그들의 종교를 무함마드가 적극적으로 헐뜯었지만 무함마드는 13년 동안 그 지역의 관습을 비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처음에 무함마드는 친구들과 가족에만 성공적이었다. 13년 후에 “그 거리의 전도자”는 단지 약 일 백 명의 확고한 추종자들을 자랑할 수 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을 무슬림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아내 외에 그의 첫 번째 개종자는 그의 젊은 사촌 Ali였다(그는 나중에 무함마드의 사위가 되었고 이슬람의 4대 칼리프가 된다). 또 다른 초기 개종자는 그의 돈과 무함마드를 쉽게 받아들인 것이 경험 없는 이단의 생존에 기여한 부유한 상인 Abu Bakr였다.

무함마드가 알라에 추가하여 지역 신들을 인정하는데 동의한 “사탄의 계시”로 알려진 사건 이후 메카인들과의 관계가 특별히 껄끄럽게 되었다. 이것이 처음에 메카인들을 기뻐하게 하였고 그들은 관대하게 무슬림들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추종자들이 그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기 시작하자 마음을 곧 바꾼다. 무함마드는 사탄이 자신을 통하여 말하였다고 주장하며 메카 신들을 인정한 것을 취소한다. (Tabari 1192, Quran 22:52 ; http://www.cmje.org/religious-texts/quran/verses/022-qmt.php#022.052

& 53:19-26; http://www.cmje.org/religious-texts/quran/verses/053-qmt.php#053.019 ).

메카인들이 집요하게 무슬림들을 조롱하였고 특별히 그들 가운데 일부는 생활이 어렵게 만들었다. 오늘날 무슬림들이 이 시련(어떤 경우에는 당연히)을 표현하기 위해서 “박해”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하나 가장 초기의 가장 믿을만한 전기 작가(Ibn Ishaq와 al-Tabari)들은 이 기간 동안 스트레스로 죽은 한 나이 먹은 여성인 한 무슬림의 죽음만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실은 현대의 이슬람 옹호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자료인데 현대의 이슬람 옹호자들은 메카에서 무슬림들이 먼저 폭력적으로 되었다(MYTH: The Meccans Drew First Blood against Muhammad 를 보라)는 것과 무함마드가 먼저 무력을 사용하였다는 것과...그리고 나중에 그것이 전적으로 불필요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못마땅한 진실에 대처하기 위하여 초기 메카 시대의 호의적인 이야기들은 보통 무슬림들이 “상존하는 고통을 받고”있었다고 주장하며 무슬림들의 투쟁을 과장한다. 그 호의적인 이야기들은 가장 초기의 가장 믿을만한 역사가들에 의하여 입증되지 않은 저작자가 미심쩍은 사건들을 또한 포함한다(MYTH: Persecution of Muslims at Mecca - Many Deaths 를 보라).

현대의 이야기 작가들과 영화제작자들(1976년 The Message라는 영화를 만든 자들)은 그들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극화하거나 또는 필연적인 “복수살인”을 위한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서 메카인 살인자의 가공의 희생자를 만들어내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 생명이 정말로 위험했던 유일한 무슬림은 - 메카의 종교를 13년 동안 조롱한 다음의 - 무함마드의 생명이었다. (MYTH: Muhammad was Tortured at Mecca 를 보라).

 

헤지라(Hijra) - 메카에서 메디나로

 

619년 무함마드의 삼촌인 Abu Talib의 죽음으로 무함마드는 메카의 지도자들에 대항하여 보호해 줄 사람이 없게 되었고 메카의 지도자들은 점차적으로 무함마드에 대한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무슬림 역사가들까지도 주목하듯이 이 상황에서 실제 도발자는 아주 명백히 무함마드 자신이었다. 메카인들이 Abu Talib에게 마지막으로 그의 조카에게 평화롭게 지내자고 말해 달라고 사정했던 Abu Talib의 임종시에 일어났던 사건을 보자:

[무함마드의 대적인] Abu Sufyan이 다른 몇몇 저명인사와 같이 Abu Talib에게 가서 말하였다: “당신이 아다시피 우리와 당신의 조카사이에 분쟁이 있으니 그를 불러서 그가 우리에게 간섭하지 말고 우리는 그에게 간섭하지 말고 그는 그의 종교를 가지고 우리는 우리 종교를 가지는 협정을 맺자.” (Ibn Ishaq 278)

무함마드는 평화공존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의 새로운 종교는 그들과 평등한 지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명백하게 그들을 지배하려고 하였다. 한편으로 무슬림들은 그들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정치적인 연합을 추구하여 메카인들에 대항하여 북쪽에 멀리 떨어진 다른 아랍 도시인 메디나의 사람들과 전쟁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Ibn Ishaq 299-301). 이것 때문에 메카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었고 메카인들은 드디어 무함마드를 잡아서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 (MYTH: Muhammad and his Muslims Fled Mecca because of Persecution 를 보라)

이것이 비록 서방세계 기준에 반하여 심한 것으로 들리지만 메카인들의 반응과 나중에 메디나에서 누구도 해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에 대하여 인지된 배신을 다룰 기회를 가졌을 때의 무함마드의 반응과의 대조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메카인들은 무함마드만 죽이는 것으로 그들의 공격을 제한했다. 이것은 무함마드가 자신의 사위인 Ali를 이용하여 집에서 탈출하고 그의 암살자들이 무함마드를 잡았다고 생각하도록 속였던 사건에서 아주 분명하다 (Ibn Ishaq 326). Ali와 그의 아내에게 아무런 해가 없었고 그들 둘 다 이후 몇 칠 동안 그 도시에 남아서 무함마드 가족의 사업을 메디나로 이전하는 것을 끝마쳤다.

이 사건을 그들 가운데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던 분쟁에서 그들의 지도자가 충성을 바꾼 것 때문에 부족 모두를 무함마드가 도살하였던 Banu Qurayza 부족의 사건(다음에 기술됨)과 비교해보라.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하였던 622년은 무슬림 달력이 시작되는 해이다.

 

메디나와 지하드의 기원

 

자기 고향과 자기 부족의 거절에 자극받은 후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특히 그가 권력을 얻으면서 빠르게 편협해지고 무자비하게 되었다. 이슬람의 가장 거룩한 책은 무함마드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영원한 저주의 재앙에 관하여 기록하는 초기에 계시된 구절들에 무슬림들의 손에 의한 폭력과 현 세상에서의 패배를 더하는 나중에 계시된 구절들로 명확하게 이 대조를 반영한다.

이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빌려온 비교적 평화스러운 종교에서 사회의 모든 면을 지배하려고 하는 호전적인 세력으로 발전한 것은 메디나에서이다. 무함마드 생애의 이 마지막 십년동안에 불신자들은 쫓겨나거나 노예가 되었고 죽음의 위협아래 개종되었고 그들의 편의를 위하여 집결되어 학살되었다.

지배를 위한 자신의 욕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무함마드는 처음으로 자기 부하들에게 희생자들이 그 공격을 예상하지 못하는 거룩한 달에 메카의 대상들을 공격할 것을 명하였다. 이것은 메카인들이 메디나에 있는 무함마드를 괴롭히지 않았음에도 일어난 일이다 (MYTH: Muhammad and his Muslims were Persecuted by the Meccans at Medina 를 보라).

무함마드는 자기 부하들에게 낙타를 모는 무고한 자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소유물을 강탈하는 것을 허용하는 “알라로 부터”의 편리한 계시들을 들려주었다 (Ibn Ishaq/Hisham 426). 무함마드와 같이 있는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물질적인 안락과 포로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전투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탐욕이 발달하였다 (MYTH: Muhammad Raided Caravans to Retrieve Stolen Property 를 보라).

때때로 전투에서 붙잡힌 사람들이 자칭 예언자 앞에 끌려와서 자신들의 목숨을 구걸하였는데 예를 들면 자신들은 결코 무슬림들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전통들은 대부분 무함마드가 그들의 간청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아주 분명하며 종종 아주 끔찍한 방법으로 어째든 그들의 처형을 명령하였다 (Ishaq 459). (MYTH: Muhammad Never Killed Captives를 보라)

대상들에 대한 그 공격 이후에 무슬림 군대가 참가한 최초의 중요한 전투인 Badr 전투가 일어났다. Badr는 메카인들이 무슬림 공격자들로부터 자기들의 대상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들을 군대를 보낸 장소였다. 오늘날 무슬림들은 자기방어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고 주장하기를 좋아하나 무함마드 당시에는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 사실 무함마드는 낙원의 약속과 그들의 종교가 다른 사람들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확신으로 주저하는 자기 병사들을 강제해야 했다 (MYTH: The Battle of Badr was Defensive 를 보라).

 

권력의 강화

 

무함마드는 Badr에서 메카 군대를 물리쳤는데 이 사건은 무함마드를 담대하게 만들어 메디나의 세 지역 유대인 부족을 분리하고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실수는 무슬림들을 받아들이고 무함마드가 유대 선지자의 계보에 속한다는 그의 주장을 거부한 것이었다. 무함마드의 토라(Torah)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것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무함마드가 읽은 성경 이야기의 버전은 - 자신이 선지자 또는 그와 같은 사람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믿는 - 그 똑같은 교훈을 가진 단편적인 동화같이 들린다).

Banu Qaynuqa, Banu Nadir, Banu Quyrayza 이 세 부족이 어떻게 그들의 종말을 맞이하였는지는 무슬림의 마음을 들여다보는데 통찰력을 주는데 무슬림의 마음은 이슬람이 아닌 종교의 사람들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선천적으로 이중적 기준을 가진다.

먼저 그들의 호의를 추구하고 얻기 위해서 무함마드는 단순히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의 종교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사실 무함마드는 그의 추종자들의 기도의 방향을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바꿨는데 이것은 그가 그들을 쫓아낼 힘을 몰래 기르고 있는 동안 유대인들이 그에 대하여 관용하는 마음을 유발하였다. 이러한 비교적 초기의 양보와 가르침들은 나중에 무함마드에 의하여 취소되었는데 유대인들이 결국 그의 종교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꾸란에서 희귀한 관용에 관한 초기 구절들은 나중에 9:29절과 같은 구절들에 의하여 폐기되었다.

유대인들의 토라에 관한 지식은 무슬림 지도자들의 진실성을 자연스럽게 위협하였는데 그것은 무함마드가 만든 자신이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주장을 쉽게 반박하였다. 그들은 또한 성경 이야기들을 통하여 무함마드가 남을 통하여 들었다는 것을 알았고 이 모순되는 것들이 계시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편리하게도 알라가 간섭하여 무함마드에게 유대인들은 무함마드가 이제까지 선지자라고 주장해온 그 증거를 감추기 위하여 그들의 경전을 고의적으로 변조하였다고 말하게 하였다. (오늘날 까지 무슬림들은 그들의 꾸란이 참고하고 있는 “진정한” 토라 또는 신약의 사본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유대인들이 그러한 명백한 술책을 알고 믿지 않고 있는 동안 아랍 다신교도들은 대규모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이것은 곧 무함마드에게 힘을 주어서 이슬람이 폭력에 의하여 강요된다는 그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였다:

우리가 모스크에 있는 동안 예언자가 와서 “유대인들에게로 가자”고 말하였다. 우리는 Bait-ul-Midras에 도착할 때까지 갔다. 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인다면 안전할 것이다. 너희들은 땅이 알라와 그의 사도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하며 나는 너희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너희들 가운데 누구라도 재산이 좀 있다면 그는 그것을 처분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땅이 알라와 그의 사도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Bukhari 53:392 (http://www.cmje.org/religious-texts/hadith/bukhari/053-sbt.php#004.053.392 )

메카의 유대인들은 명백한 협박아래 이슬람으로 개종할 기회를 제공받은 불행한 사람들의 매우 긴 계보에서 첫 번째 사람들이었다. 강제개종은 바로 무함마드에 의하여 시작된 무슬림 전통이다 ( MYTH: Muhammad Rejected Conversions to Islam made under Duress 를 보라).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그리고 그들의 재산)를 유지하기로 결정하자 무함마드는 메디나의 유대인들에 대하여 전쟁할 명분을 찾았다. 어떤 무슬림들에 따르면 첫 번째 부족인 Qaynuqa족은 그들 부족 가운데 한사람이 무슬림 여성을 괴롭혔다는 구실로 그들의 집과 땅에서 쫓겨났다. 그 가해자가 이 사건 전에 한 무슬림에 의하여 살해되었지만 그 무슬림도 역시 첫 살인에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그 공동체 전체를 포위하고 그 부족을 패배시킨 다음에 무함마드는 모든 남자들을 처형하기를 원하였으나 한 사람에게도 밖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 나중에 알라가 그것에 대하여 “책망하였다”. Qaynuqa족은 강제로 쫓겨났고 무슬림들은 그들의 소유물과 재산을 차지하였다. 무함마드는 개인적인 자신의 몫으로 1/5의 부당이득을 챙겼다 (그는 꾸란에 확실히 그 규정을 포함시켰다).

이 사건은 이슬람 내부의 선천적인 집단정체성의 미숙한 원리에 도움을 주었으며 그로인하여 이슬람 외부의 종교 또는 사회적 조직의 어느 구성원이라도 무슬림을 모욕하거나 해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유죄이며 처벌받아 마땅하다. (무함마드의 처벌은 보통 그 범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두 번째 부족인 Banu Nadir(http://www.thereligionofpeace.com/Muhammad/myths-mu-nadir.htm )에 속한 사람들이 무함마드를 살해하려 하였다는 혐의로 그에 의하여 비난받았다. 이 사건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이 무함마드의 명령으로 무슬림들이 (Ka'b al-Ashraf라는 이름의)Banu Nadir족의 지도자를 포함하여 유명한 유대인들 몇 명을 살해한 후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MYTH: Muhammad Never Approved of Murder 를 보라)

이슬람의 예언자는 자신이 보복(그는 알라가 자신에게 그 보복을 계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의 목표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신속히 Banu Nadir족의 공동체를 포위하였다. 그들이 항복하도록 만든 다음에 이 메디나의 원주민들은 곧 바로 그 새로 들어온 무슬림들에 의하여 그들의 집과 땅에서 추방되었고 그 무슬림들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만큼 가지게 되었다 (Ibn Ishaq 653). (자기 부하들을 실망시켜서 이 당시 무함마드는 자신의 몫으로 모든 몫을 몰수하는 것을 허용하는 알라의 계시(http://www.cmje.org/religious-texts/quran/verses/059-qmt.php#059.007 )를 만들어내었다).

이슬람아래서 어떻게 속임수가 명령되는지에 관한 비판적인 예에서 Banu Nadir(Usayr ibn Zarim의 지도하에) 부족의 일부 생존한 자들은 평화협정 약속에 속아 그들의 성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을 인도하러 무함마드가 보낸 무슬림 분견대는 일단 그들이 경계를 거두자 그들을 도살하였다 (Ibn Ishaq 981). (MYTH: Muhammad always Disapproved of Dishonesty 를 보라).

 

 

 


 

원문보기 http://www.thereligionofpeace.com/Pages/History.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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